[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39> 단오(端午)와 창포(菖蒲)] “감히 이 풀과 함께 높은 이름 다툴 수는 없으리라”
고대로부터 중국에서는 홀수인 ‘기수(奇數)’를 ‘양수(陽數)’로 쳐서 ‘음수(陰數)’로 여긴 짝수의 ‘우수(偶數)’보다 우위에 두었다. ‘역경’에서 ‘양효(‒)’를 9로, ‘음효(‑‑)’를 6으로 표기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관념에서 한 해에 같은 양수가 겹치는 날을 길일로 생각해, 명절로 삼았다.
그중 5월 5일이 단오다. 단오와 가장 인연이 깊은 식물은 창포다. 그래서 음력 5월을 ‘포월(蒲月)’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이날 여인들이 창포 삶은 물로 머리를 감는 풍속이 성행했다. 창포의 진하고 시원한 향기가 머릿결을 윤나게 하며 역병도 막아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창포를 베어 문 위에 걸어 두는 풍습이 있었다. 그 향기가 해충을 쫓을 뿐 아니라 곧게 뻗은 질기고 뾰족한 잎이 칼을 연상시켜 집 안으로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주술적인 의미도 있었다. 창포와 함께 역시 향이 짙은 쑥대를 잘라 걸기도 했다. 이에 관한 다음의 대련(對聯)이 유명하다. “손으로 쑥 깃발을 잡아 백 가지 복을 부르고, 문에 창포 검을 걸어 천 가지 악한 기운을 벤다(手執艾旗招百福, 門懸蒲劍斬千邪).” 길쭉한 쑥대에 달린 잎이 깃발처럼 보여 그렇게 표현했다. 이 같은 풍속은 본격적인 여름으로 진입하는시점에서 위생을 위한 최소한의 대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임지(任地)’ 편에는 이런 기록이 보인다. “동지 후 57일에 창포가 처음 나오니, 백 가지 풀 중에서 먼저 생기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밭을 간다(冬至後 五旬七日, 菖始生, 菖者百草之先生者也. 於是始耕).” 또 ‘회남자(淮南子)’의 ‘설림훈(說林訓)’에는 창포의 부작용에 대한 언급도 있다. “창양은 벼룩과 이를 쫓지만, 그리마를 오게 한다. 작은 해를 물리치려다 큰 도적을 부르고, 작은 쾌락을 얻으려다 큰 이득을 해친다(昌羊去蚤虱而來蚙窮. 除小害而致大賊, 欲小快而害大利).” ‘창양’은 창포의 다른 이름이다.
창포는 ‘시경’에 이미 등장한다. 4수에 걸쳐 언급된 ‘포(蒲)’가 창포를 가리키는지 부들 등 다른 수변 식물까지 말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음은 그중 3장으로 된 ‘택피(澤陂)’의 첫 장이다. “저 못가의 둑에, 창포와 연꽃이 있네. 아름다운 사람 하나 있어, 가슴 아파 어쩔거나. 자나 깨나 어찌할 수 없어, 눈물만 쏟아지네(彼澤之陂, 有蒲與荷. 有美一人, 傷如之何. 寤寐無爲, 涕泗滂沱).”
창포에는 연못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넓고 긴 잎의 일반적인 창포 이외에 계곡 등의 돌 위나 바위틈에서 주로 자라는 가늘고 짧은 잎의 석창포(石菖蒲)도 있다. 일반 창포는 겨울이 되면 잎이 시들어 말라버리지만, 석창포는 사계절 내내 푸르다. 이 석창포에는 예부터 신선이 먹는 약이라거나 범인이 장복하면 장수하고 신선도 될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의 지리학자 역도원(酈道元·470~527)은 ‘수경주(水經注)’에 “돌 위의 창포 중 한 치에 아홉 마디가 있는 것은 약으로서는 가장 신묘하여 오래 복용하면 신선이 된다(石上菖蒲, 一寸九節, 爲藥最妙, 服久化仙)”고 전해 들은 바를 기록했다.
그에 앞서 동진의 도교(道敎) 학자 갈홍(葛洪·283?~363?)은 ‘포박자(抱朴子)’의 ‘선약(仙藥)’ 편에서 “창포는 총기를 더해준다(菖蒲益聰)”고 그 효능을 말한 뒤에, “한종(韓終)이라는 사람이 창포를 13년 동안 복용하자 몸에 털이 생겨나고 하루에 1만 자의 글을 읽어 모두 외웠으며, 겨울에 알몸으로도 추운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적었다.
또 그가 지은 지괴(志怪·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함) 소설집 ‘신선전(神仙傳)’에는 다음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漢)의 무제(武帝)가 제천 의례를 위해 신하들과 숭산(嵩山)에 올랐다가 밤에 키 큰 신선을 만났다. 그는 자기가 구의산(九疑山)의 신선이라고 밝힌 다음 “숭산의 석창포가 한 치에 아홉 마디가 있어 먹으면 장수한다는 말을 듣고 캐러 왔다”고 말한 뒤 홀연 사라졌다. 이에 무제도 2년 동안 창포를 캐어 복용했지만, 체질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신하들도 모두 다투어 따라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왕흥(王興)이란 사람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오랫동안 끊임없이 창포를 복용해 마침내 장수했다.
이런 이야기가 후대에 널리 알려져 이백(李白)도 고시 ‘숭산채창포자(嵩山采菖蒲者)’ 로 읊은 바 있다. “신선에게는 옛 모습이 많아, 두 귀가 어깨까지 드리워졌다네. 숭악에서 한무제를 만남에, 구의산의 신선인 듯. 내가 와서 창포를 캐나니, 먹으면 목숨을 늘릴수 있다오. 말이 끝나자 갑자기 보이지 않으니, 그림자 없애고 구름과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오. 황제에게 일러줘도 끝내 깨닫지 못하더니, 마침내 무릉의 밭으로 돌아갔다네(神仙多古貌, 雙耳下垂肩. 嵩嶽逢漢武, 疑是九疑仙. 我來采菖蒲, 服食可延年. 言終忽不見, 滅影入雲煙. 喻帝竟莫悟, 終歸茂陵田).” 무릉은 무제의 무덤이다.
당 중기의 장적(張籍)은 지인에게 말린 석창포를 보내며 지은 ‘기창포(寄菖蒲)’라는 고시에서 이렇게 석창포의 신통함을 말하고 있다. “돌 위에 창포가 생겨나 한 치에 열두 마디로다. 신선이 나에게 권해서 먹으니, 머리가 푸르러지고 얼굴은 눈처럼 되었다오. 사람을 만나 그대에게 붉은 주머니 하나 보내는 까닭은, 편지 속에 이 비방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라. 그대가 와서 서하산의 짝이 될 수 있다면, 그대와 함께 현묘한 세계로 들어가리라(石上生菖蒲, 一寸十二節. 仙人勸我食, 令我頭青面如雪. 逢人寄君一絳囊, 書中不得傳此方. 君能來作棲霞侶, 與君同入丹玄鄉).”
이러한 석창포를 송대 이후에는 주로 문인들이 관상용으로 많이 길렀다. 그중에서도 소식(蘇軾)의 석창포 애호는 유별났다. 그는 29세 때 서리와 눈이 내린 산속에서 처음으로 석창포를 발견하고 뿌리가 너무 깊게 박혀 쉽게 캘 수 없는 아쉬움을 이렇게 토로했다. “산 높고 서리와 눈으로 애먹어, 싹과 잎을 뽑을 수 없어라. 아래로는 천년의 뿌리가 있어, 똬리 튼 새끼용처럼 엉겨 붙어 있구나. 길이 귀신의 지킴을 받는데, 덕이 박하면 어찌 감히 훔치려 하겠나(山高霜雪苦, 苗葉不得抽. 下有千歲根, 蹙縮如蟠虬. 長爲鬼神守, 德薄安敢偷)?” 동생 소철(蘇轍)이 보내온 시에 화답한 작품의 일부분이다.
소식은 또 ‘석창포찬(石菖蒲贊)’이란 글도 지어 약재로서의 영험함과 외형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그 강인한 생명력과 담백한 성질을 칭송했다. 이 글에서 그는 장강 중류의 자호산(慈湖山)에서 얻은 석창포와의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석창포를 돌 화분에 심고 그 사이에 돌 몇 개를 배치해서 배 안에 놓고 애지중지하며 길렀다. 그러나 나중에 육로로 타지에 가게 됐을 때 갖고 갈 수가 없어 인근 구강(九江)의 도사에게 보내어 관리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차 이곳을 다시 지날 때 그 안부를 묻겠다고 했다.
북송 말에서 남송 초에 걸쳐 활동하던 시인 증기(曾幾·1085~1166)는 벼슬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힌 은사(隱士)의 모습을 다음의 ‘석창포(石菖蒲)’ 절구로 표현했다. “창은 밝고 책상은 정갈한데 방 안은 텅 비었으니, 모두 은사에게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한다네. 은사에게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지 말지니, 샘물 긷고 이슬 받아 창포를 기른다오(窗明几淨室空虛, 盡道幽人一事無. 莫道幽人無一事, 汲泉承露養菖蒲).”
그 뒤 남송 말의 문인 사방득(謝枋得· 1226~1289)은 장편의 ‘창포가(菖蒲歌)’ 끝에서 다음과 같이 석창포를 극찬했다. “인간 세상 천 가지 꽃과 만 가지 풀이 모두 영예롭고 요염하지만, 감히 이 풀과 함께 높은 이름 다툴 수는 없으리라(人間千花萬草盡榮艷, 未必敢與此草爭高名).” 이는 역대 문인들의 석창포 사랑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석창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역대의 많은 화가도 석창포를 즐겨 그렸다. 청 중기에 활동하던 양주팔괴(揚州八怪) 중 김농(金農)의 그림이 특히 유명하다.
단오절을 맞아 창포에 관한 이야기와 시문을 살펴보았다. 창포 중에서도 석창포를 옛사람들은 특히 좋아했다. 소식의 경험처럼 이를 구하기도 대단히 어려웠으나, 오늘날에는 원예 기술의 발달로 너무나 손쉽게 얻을 수 있다. 선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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