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37년 진료 기록' 4권의 책으로 펴낸 김철권 동아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 “이별에 극단 선택…‘마음의 구멍’, 스치는 바람처럼 놓아두라”
50대 중년 여성이 남편 손에 이끌려 정신과 진료실에 들어온다. 더운 날씨에도 긴 소매 스웨터에 긴 치마로 온몸을 옷으로 감싸고 있다. 여성이 들어오자, 악취가 코를 찌른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여성은 옷에 배어 있는 아들의 냄새가 없어질까 봐 옷을 갈아입지 않는다. 의사는 “아들의 옷은 아들에 대한 기억의 상징일 수 있다”면서도 “아들의 기억을 붙잡고 있으면 죽은 아들이 저승으로 길을 떠나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될 수 있다. 사랑한다면 놓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 정신과 의사의 37년간의 기록’ 1권 발췌)
김철권 동아대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어릴 적 꿈은 소설가였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유언대로 의대에 진학했지만, 그는 진료실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다. 37년 동안 수많은 환자를 만났고 그들의 증상을 글로 기록했다. 이 방대한 기록은 지난 4월 네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1400쪽이 넘는 이 책엔 정신 질환 진료 사례와 치료법, 그의 진료 철학이 담겨 있다.
“사람의 마음에는 구멍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하는 이유도 이 구멍을 채우려는 데 있죠. 그 구멍을 어떤 것으로 메우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5월 31일 부산 동아대학교병원 연구실에서 만난 김철권 교수는 인터뷰 내내 “마음의 구멍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해소하지 못해 각종 이상 증세로 고통을 받다 정신과를 찾는다고 그는 설명했다. 김 교수는 세계인명사전 ‘마르퀴스 후즈 후(Marquis Who’s Who)’에 이름을 올린 정신건강의학 분야 권위자다. 다음은 일문일답.
정신의학에 관한 이론서는 많지만, 사례를 바탕으로 쓴 책은 드물다.
“문득 진료실에서 환자들과 나누었던 말, 그들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세상 사람에게 전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곧 일종의 의무감으로 바뀌었다. 의료인 비밀 엄수 등의 이유로 의사가 글을 쓰는 데는 여러 제약이 따른다. 환자들에게 집필 취지를 설명하고 허락을 얻었다. 환자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환자 이름을 익명으로 기술했다.”
네 권의 책을 관통하는 단어가 '구멍'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의 구멍이 있다. 바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결핍이다. 사람들은 이 구멍을 연인, 가족뿐 아니라 소유물, 돈, 명예 등으로 채우려고 한다. 그게 욕망이다. 하지만 어떤 대상을 소유한다고 해서 결핍이 온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공허함, 외로움, 쓸쓸함을 완전히 없애줄 것이라는 환상을 대상에게 투영할 뿐이다. 마음이 외롭거나 슬프거나 쓸쓸할 때는 자신의 가슴에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그냥 그대로 인정해 보자.”
그게 쉽지 않을 것 같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생각이다. 고통스러운 것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그 생각이 올가미처럼 당신의 온몸을 옥죄어 올 것이다. 고통에 대한 저항이 크면 클수록 당신의 고통은 심해진다. 흙탕물이 담겨 있는 그릇을 떠올려 보라. 흙탕물을 깨끗한 물로 만드는 방법은 그냥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다. 지금 심각한 문제도 어느 순간 저절로 해결된다. 당신이 죽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이 잘될 수 있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스치는 바람처럼 고통도 그냥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불행하다는 느낌도 줄어들 수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
책에는 가족, 연인이 세상을 떠나 정신 질환을 얻는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극도의 고통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랑했던 대상이 사라지면, 우리 뇌는 그 대상에 쏟아부었던 에너지를 그와의 기억에 과도하게 투입하게 된다. 기억에 집착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 통제 불가능한 감정 상태가 되면 정신병을 얻는다.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때로는 타인에게 해를 가한다.”
최근 20대 의대생이 이별을 통보한 여자 친구를 살해해 충격을 줬다.
“대체로 자신이 버림받을 것, 혹은 상대방을 다신 보지 못할 것이라는 슬픔을 감당할 여력이 없을 때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났을때 그 사람도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건 결국 죽어서라도 하나가 될 것이라는 집착과 증오가 아닐까 싶다.건강한 ‘자기애(自己愛)’가 있는 사람은 자살, 자학, 집착 등의 선택을 하지 않는다. 흉악한 범죄를 정당화할 순 없지만, 그가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라는 분석은 섣부를 수 있다고 보는 편이다.”
의사가 50대에 예술학(영화 전공)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환자를 만나면서 약물 처방과 일반 상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신의학만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느꼈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더 깊게 이해하고 싶었는데, 평소 좋아하던 영화가 그 방편이 되었다. 거의 모든 인간의 유형은 영화에있다. 영화감독은 인간의 심리를 화면으로 보여주는 천재이자 정신 분석가다. 영화는 인간의 욕망을 읽는 좋은 도구이자 그 숨은 의미를 알려주는 해설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나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가들을 직접 찾아다녔다고.
“정신분석 공부는 내 심연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였다. 나를 이해하는 건 환자를 이해하는 길이고, 환자를 이해하는 건 곧 나 자신을 이해하는 길이기도 했다. 이 분야의 석학들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 이론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환자의 증상은 말로 쓰인 상형문자다. 그것을 해독할 수만 있다면, 그 환자의 욕망을 읽고 치료와 완치의 가능성도 열 수 있다.”
환자 치료에는 어떤 도움이 되었나.
“그 덕분에 나는 거친 욕을 하는 남자에게 ‘동요 부르기’를 과제로 내줄 수 있었다. 또 웃음을 잃은 환자에게 마술을 보여주며 웃게 하는 처방을 할 수 있었다. 지나간 삶이 아무 의미 없다고 호소하는 노인에게는 젊은 날 행복했던 시절 찍은 사진을 함께 보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일깨워 주려고 했다. 씻지 않고 옷도 안 갈아입는 만성 정신병 환자에게는 외래에 올 때 목욕하고 정장을 입고 오도록 숙제를 주기도 한다.”
타로, 미술, 사진 등을 치료에 활용한다는 게 인상 깊다.
환자 마음을 열기 위한 수단이었다. “때로는 말보다 어떤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오감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감각을 발달시킨다. 환자는 타로나 사진에 나타난 자신의 감정을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대학병원에서 정년 퇴임 이후 계획은.
“내년 2월 말 정년 퇴임을 하고 3월에 개원할 예정이다. ‘꼭 정신과 약을 처방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나의 의문에 답하기 위해 개원을 하려는 것이다. 정신과 외래에서 실험해 본 결과, 많은 신경증 환자와 일부 정신증 환자의 경우 약물 처방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 약을 먹기 시작하면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내가 환자에게 처방했던 약을 모두 먹어보기도 했다.”
다시 태어나도 정신과 의사를 할 것인가.
“37년 동안 정신과 의사로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환자였다. 정신과 의사가 된 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축복이어서 나는 자다가도 일어나 좋아서 웃고 잔다. 모든 환자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기에 이번에 나온 책 역시 세상에 하나뿐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정신과 의사는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꿈도 이루게 해줬다. 내 삶이 곧 소설이었으니까. 다시 태어나도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다.”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