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분 내내 관객 멱살 잡고 내달리는 '탈주'
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간결한데, 폭발적이다. 투박한데, 스타일리시하다. 좌우 둘러보지 않고 한 곳만 향해 내달리는 응축의 에너지가 짜릿한 영화 '탈주' 이야기다. 2021년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이제훈이 구교환에게 보낸 공개 러브콜 이후 이루어진 두 배우의 만남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박하경 여행기' 이종필 감독의 만남이 더해지며 근사하게 꽃을 피웠다.
'탈주'는 휴전선 인근의 북한 최전방 군부대에서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중사 규남(이제훈)의 탈주 준비로 시작한다. 길고 긴 군 생활이 끝나가지만, 출신성분이 나쁜 규남에게 앞날은 '농장 아니면 탄광'행일 만큼 깜깜하다. 그렇기에 규남은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남쪽으로의 탈주를 계획한다. 문제는 규남의 계획을 하급 병사 동혁(홍사빈)이 먼저 알아챘다는 것. 먼저 탈주를 시도한 동혁을 말리려던 규남까지 탈주병으로 체포되고, 그렇게 규남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규남의 운명을 나락에서 건져 올리는 인물은 보위부 소좌 리현상(구교환). 규남의 아버지가 현상의 집안 운전수였던 어릴 적 인연을 매개로 다가온 현상은, 규남을 다른 탈주병을 체포한 '노력 영웅'으로 둔갑시켜 자신의 실적을 올리는 동시에 규남에게 조금 더 나은 운명을 제시한다. 보위부 사단장 직속 보좌라는 제안은 규남의 처지에선 상당히 좋아 보이는 조건이지만, 그럼에도 규남은 자신의 계획 그대로 탈주를 시도한다.
'탈주'는 탈북을 시도하는 규남과 그를 쫓는 현상의 이야기지만 흔히 예상할 수 있는 탈북기와는 전혀 다른 결을 보여준다. 실패할 자유가 있는 곳을 꿈꾸는 규남과 러시아 유학을 다녀올 만큼 빼어난 피아니스트지만 보위부 소좌로 근무하는 현상은 각각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와 운명에 순응하는 자를 상징하는데, 이는 이상과 현실의 대립으로도 보이고, 어디론가 탈주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으로도 읽힌다. 북한이라는 배경은 이들의 선택을 조금 더 극단적으로 거들 뿐, 공간을 대한민국이나 아프리카의 어느 작은 나라로 바꿔도 이 영화가 담고자 한 메시지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탈주'는 북한 배경의 작품에서 흔히 등장할 수 있는 이념과 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출신성분이 나쁘기에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규남의 설정은 있지만 그에 따른 구구절절한 사연도 담지 않는다. 규남과 현상의 전사 또한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심지어 북한 사람이 있으면 세트로 등장해야 할 것 같은 남한 사람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뻔한 신파와 휴머니즘을 내던지고 '탈주'는 오로지 '실패할 자유를 얻기 위해' 자신의 의지로 내달리는 규남과 그를 쫓는 현상의 추격에 집중하며 속도감 있게 내달린다.
처음엔 단계별로 스테이지를 깨는 게임 속 '슈퍼마리오'를 보는 느낌으로 규남의 질주를 바라보던 관객들은 그 속도감 있는 질주를 함께하는 묘미에 스멀스멀 젖어들다가 어느덧 늪에 빠지고 지뢰를 밟는 등 고군분투하는 규남과 함께 호흡하는 경지에 이른다.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통하는 욕망을 건드린 '탈주'는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94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빠른 동일시와 몰입을 꾀하며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이제훈과 구교환이라는 조합은 역시나 달콤하다. 립밤, 핸드크림, 피아노 등 북한 군인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요소들을 활용하는 리현상 캐릭터는 캐면 캘수록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 같은 복잡다단한 인물. 켜켜이 똬리를 튼 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다가도 순간적으로 광기를 표출하는 구교환의 곡선 같은 연기가 일품이다. 여기에 리현상과 인연이 있는 선우민 캐릭터로 송강이 특별출연하며 현상의 캐릭터를 한층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이에 반해 이제훈의 규남은 게임 속 캐릭터처럼 앞만 보고 내달리는 직선의 연기를 선보이며 완연히 대비되는 맛. 현상에 비해 단선적인 캐릭터로 보이지만 그 대신 러닝타임 내내 주저하지 않고 뛰고 구르고 빠지는 등 온몸을 내던진 연기에서 그 노고가 절절히 보인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편집이 돋보이는 스타일리시한 연출, 그리고 달파란의 극적인 사운드와 음악이 더해지며 몰입과 쾌감은 한층 배가된다.
물론 '탈주'에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속도감을 위해 생략된 설명들이 아쉽게 여겨지는 부분도 있고, 유랑민 무리의 이야기이나 에필로그의 장면처럼 다소 생뚱맞게 비쳐지는 부분도 있다.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그럼에도 쫓고 쫓기는 추격 액션의 장르적 재미가 확실하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의 공감이 명확하며, 대비되는 배우들의 열연이 쫄깃하니 극장에서 볼 이유는 충분하다. 12세 관람가, 7월 3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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