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남매 엄마의 ‘행동 파워’… ‘따뜻한 보수’ 로 새역사에 도전[Leadership]

이현욱 기자 2024. 6. 2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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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adership - EU 집행위원장 연임 청신호 켜진 폰데어라이엔
40대 정치데뷔 저출생 파이터
브렉시트 국면 EU 안정운영도
코로나때 연구비 대대적 지원
EU국가 10억명분 조기 확보
러-우크라 전쟁에 결단력 발휘
유럽단결 촉구‘러 고립’가속화

다음 달 ‘유럽 대통령’격인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의 선출을 앞두고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현 집행위원장이 EU 회원국들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연임이 유력시되고 있다. 유리천장을 깨고 여성 최초로 독일 국방장관과 EU 집행위원장을 역임한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연임에 성공할 시 또 한 번 새 역사를 쓰게 된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 속에 ‘행동하는 리더십’을 발휘해 EU를 안정적으로 이끌며 국제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2차 세계대전 후 유럽 사회가 맞은 안보적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에 맞서 회원국들을 하나로 묶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1958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13세에 독일로 이주했다.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독일 하노버 의대에 진학해 의학박사를 받았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2남 5녀의 7남매 어머니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28세 때 첫 아이를 낳고 ‘워킹맘’에 대한 사회적 부정적 인식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일벌레인 그는 경력단절이 싫었고 사회가 여성이 일과 양육을 병행할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34세 때 남편의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학위 과정으로 인해 캘리포니아에 머물 당시 미국 아버지들이 자녀 양육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에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스스로 여성이 일과 양육을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갔다. 남편이 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4년여 정도만 전업주부로 지냈고, 이후는 의사인 남편이 자녀 양육을 주로 맡도록 한 것이다. 훗날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더 많은 남성이 내 남편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2020년 9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벨기에 브뤼셀 유럽의회에서 국정연설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행동하는 리더로 ‘따뜻한 보수’ 지향…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앞장서=산부인과 의사 겸 의대 교수로 일하던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42세에 정계에 발을 들였다. 중도 보수 기독민주당 소속으로 니더작센주 지방의회에 진출해 니더작센주 총리를 지낸 아버지 에른스트 알브레히트의 후광 속에서 승승장구했다. 이후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앙겔라 메르켈 당시 총리에게 발탁돼 2005년 가족여성청년장관을 맡으며 40대 중반에 화려하게 중앙 정치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가족여성청년장관으로 근무하면서 7남매의 어머니답게 ‘저출생 파이터’로 명성을 날렸다. 출산 증가가 경제발전에 기여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던 그는 어린이집을 대폭 확충했고 남성의 2개월 유급 육아휴직 제도를 도입하는 등 ‘보수주의 페미니즘’을 지향했다. 이 때문에 한때 기민당 내 진보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이후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노동장관을 역임하며 체급을 한 단계 올렸다. 그는 대기업 이사회 내 여성 비율 할당제와 최저임금제 등 중도 진보의 사회민주당이 주장한 정책을 메르켈 전 총리의 반대에도 밀어붙이며 ‘행동하는 리더’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노동장관 당시 직원들에게 긴급한 경우가 아니면 근무시간 외에는 연락하지 않도록 하는 등 워라밸에도 신경을 썼다. 2013년 12월에는 독일에서 여성 최초로 국방부 장관에 임명됐다. 이에 앞서 의사 출신이어서 보건장관에 유력 후보로 언급됐던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메르켈 전 총리에게 보건장관을 맡게 되면 새 내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배짱을 보였다. 결국 그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메르켈 전 총리는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사회정책은 물론 안보 등 국제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매우 어려운 임무를 맡았지만 잘해낼 것으로 믿는다”며 큰 신뢰를 보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국방장관 재임 시절 국제적 분쟁에 개입하며 대외정책에선 강경파로 분류됐지만, 내부적으론 군대를 ‘최고의 직장으로 만들자’며 사병 복지에도 앞장서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선보이기도 했다.

지난 17일 폰데어라이엔(왼쪽 네 번째) EU 집행위원장이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비공식 EU 정상회의에서 EU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코로나19·우크라이나 전쟁 위기에 빛난 행동의 리더십… 하나의 유럽 만들어=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2019년 최초의 여성 EU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국내정치를 넘어 국제정치무대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임기 시작과 함께 브렉시트라는 큰 과제를 떠안게 됐다. 결국, 영국 집권 보수당의 강경파들로 인해 브렉시트가 현실화했지만,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이후 브렉시트 혼란을 잘 관리해나갔다. 특히 영국의 이탈로 EU가 축소된 상황에서 또 다른 대형 악재였던 코로나19 위기를 EU 통합의 발판으로 만들었다.

코로나19 초기에 EU의 협력·연대가 실종됐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직접 27개 회원국 입장을 조율해 최초의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는 데 공을 세웠다. 실제 프랑스·네덜란드·독일·이탈리아는 영국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먼저 도입하려고 했지만, 자국 우선주의로 혼란과 분열을 예상했던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이를 막아낸 뒤 백신 지원책을 약속했다. 2020년 4월 제약사들이 임상시험을 시작하며 백신 개발에 대한 가능성을 보이자,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EU 산하 유럽투자은행(EIB)에서 보통 1년이 걸리는 연구·개발비 대출 심사를 2개월로 단축했고, 바이오엔테크엔 1억 유로(약 1486억 원)를 대출해줬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접종을 시작한 제약사 화이자·바이오엔테크의 예상보다 빠른 백신 개발도 이러한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의 대대적인 지원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이러한 자금력에 협상력까지 더하며 EU 회원국에 필요한 10억 명분의 백신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를 통해 EU의 더 많은 생명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코로나19 직후 의료물자·경기부양·국경 폐쇄 등으로 분열의 기로에 놓여 있었던 EU의 연대와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다.

지난 16일 스위스 뷔르겐슈토크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회의에 참석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왼쪽 두 번째)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네 번째) 우크라이나 대통령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AFP 연합뉴스

2022년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역대급 겹악재를 맞았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행동하는 리더십을 다시 한번 보여주며 우크라이나 지원과 대러시아 제재를 이끌었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중단이란 맞보복으로 유럽에 에너지 대란이 일어났음에도 타협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전쟁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만 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미래가 달린 전쟁”이라면서 유럽의 단결을 촉구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의 호소에 EU 각국은 앞장서 우크라이나에 무기 등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며 러시아의 대규모 공세를 막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현재 EU 차원에서 우크라이나와 안보 협정 체결도 앞두고 있어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의 러시아 고립작전엔 더욱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이러한 리더십 덕에 2년(2022·2023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1위에 올랐다. 그가 권위주의에 맞선 유럽의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라는 인식이 국제사회에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 지금 EU 정상들은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연임에 성공해 다시 한번 유럽을 강력히 이끌어주길 바라고 있다. 이에 파이낸셜타임스(FT)는 “EU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과의 긴장, 주요국의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 유럽 국가들이 변화보다는 연속성을 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현욱 기자 dlgus3002@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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