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그 뒤 20년, 변하지 못한 것

박현정 기자 2024. 6. 2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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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프리즘]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밀양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피해자의 삶에서, 피해자의 눈으로,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박현정 | 젠더팀장

2004년과 2024년은 다르다고 했다. ‘밀양 집단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20년 전과 비교해 수사·재판 체계가 많이 바뀌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고등학생 가해자 30명은 일반 형사재판이 아닌 소년보호재판으로 넘겨져 소년원 생활을 하거나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 또 다른 가해자 10여명은 피해자와 합의했거나 피해자가 낸 고소장에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했다. 피해자가 어리더라도 직접 고소하지 않으면, 국가가 가해자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친고죄 조항 탓이었다. 피해자를 향해 고소를 취하하라는 협박과 회유, 합의 강요가 이어졌다. 수사기관은 피해 내용과 피해자 인적 사항을 언론에 누설했고, 피해자에게 가해자 40여명을 직접 대면하게 했으며 심지어 “밀양 물 다 흐려놨다” 같은 폭언까지 쏟았다.

2024년에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면, 범행과 나이 등을 고려했을 때 가해자들은 소년부 송치가 아닌 형사재판을 받았을 거라고 했다. 친고죄가 사라졌으므로(2007년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2013년 모든 성범죄에 적용) 범행에 가담하고서도 처벌을 면한 이들이 없거나 줄었을 것이다. 피해자 국선변호인(2012년 도입)의 도움으로 수사·재판 과정에서의 2차 피해를 조금이나마 덜거나, 아동을 온전히 보호하지 못하는 가정에서 피해자를 분리해 ‘강요된 합의’로 몰아넣는 상황은 피했을지 모른다.

이런 법제도의 변화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에게 진 빚이기도 하다. 한 경찰은 말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도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 개념이 일선에 없었어요. 밀양 집단 성폭력 사건은 경찰이 2차 피해를 방지해야 할 ‘직무상 의무’가 있음을 인정한 첫 판례이기도 해요.” 대법원(2008년)은 경찰이 피해자 자매에게 한 모욕, 인적 사항 누설, 범인을 공개적으로 지목하도록 한 행위 등에 대해 ‘직무상 의무’를 소홀히 해 고통을 줬다며 국가가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해 함께 분노한 사람들도 변화의 밑거름이었다. ‘밀양 집단 성폭력 사건 해결을 위한 네티즌 연대’는 2004년 말 서울 광화문 광장으로 나와 미흡한 수사를 규탄하고 법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촛불을 들었다.

그럼에도, 2004년과 2024년은 다르지 않다. 한 사람의 인격을 말살하는 집단 성범죄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죄명만 달리한 채 이어지고 있다. 교제폭력이나 가정폭력, 성매매를 비롯한 젠더폭력 피해자 보호망도 헐겁다. 가해자 처벌에 초점이 맞춰진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 회복 문제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살아내는 일상이 20년 전과 같을지도 모른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13일 대신 전한 입장문에서 피해자는 “가끔 죽고 싶을 때도 있고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미친 사람처럼 울 때도 있고 멍하니 누워만 있을 때도 자주 있지만… 이겨내 보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간 피해자에 대한 공적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주거 환경과 몸과 마음의 건강, 사회관계망 모두 불안정한 상황이라고 지원단체는 전했다.

회복되지 못한 일상을 살아내는 피해자가 그 하나뿐일까. 형사 사건을 많이 맡아온 변호사는 20년 전 범죄가 드러낸 문제가 특별히 예외적인 게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진짜 부끄럽지만 그 당시 사법 현실이 그랬습니다. 어처구니없는 판결도 많았고, 어떻게든 피해자 거처를 알아내 합의를 보러 다니는 일도 많았던 시절이었어요.” 그 시간을 거쳐 간 피해자들이 일상을 회복하도록 돕는 공적 지원도, 공동체의 위로도 너무나 부족하다고 안타까워했다.

돈을 노린 유튜버들의 가해자 신상 폭로와 이런 행태를 중계 보도하는 언론의 소란 속에서, 피해 이후 삶을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목소리는 새어 나오지 않는다. 이들에겐 사건 당시와 2024년이 다를까. 국가나 우리 사회가 한번도 물은 적 없기에 아직 듣지 못한 답이다.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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