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개정 반대론’ 억지·왜곡 투성이...일반주주 피해 나몰라라
윤석열 정부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뿐만 아니라 주주(이익)까지 확대하기 위해 상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지배주주의 이익을 위해 나머지 주주의 이익을 희생시켜도, 회사에만 손해가 없다면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취지이다. 정부는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해 ‘밸류업 정책’을 추진했지만, 후진적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빠진 ‘맹탕 대책’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구체적인 방안 마련을 지시한 뒤 이복현 금감원장,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 장관이 잇달아 상법 개정 필요성을 밝히면서 탄력이 붙고 있다.
하지만 재계는 회사이익과 주주이익은 다르지 않다거나, 해외입법 사례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상법 개정에 반대한다. 대다수 보수언론도 소송남발, 경영혼선 등을 우려하며 맞장구친다. “자유 시장경제 원칙 위배”(한국경제 사설), “황금알 낳는 거위 배 가를 수도”(조선일보 칼럼) 같은 자극적인 표현까지 동원한다. 하지만 재계와 보수언론의 주장은 상당부분 사실과 다르거나, 근거가 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상법 개정 반대론 중에서 세가지 핵심쟁점을 살펴봤다.
회사이익과 주주이익 구분 없다?
상법 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된 결정적 계기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향후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 헐값발행 사건이다. 에버랜드 사건은 한국사회에 재벌 불법편법 상속증여의 심각성을 일깨워졌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지배권 승계를 목적으로 전환사채를 헐값에 발행한 뒤 기존 주주인 삼성 계열사들에는 실권(인수 포기)을 지시해서, 이재용 회장 등 자녀들이 인수할 수 있도록 했다. 검찰은 법학교수 43명의 고발을 무시하다가,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 이후 지각수사 끝에 이 전 회장 등을 배임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09년 5월 회사 이익과 주주 이익을 별개로 구분하고,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의 이익으로 한정하면서 무죄를 확정했다. 에버랜드의 지배권을 이재용 회장에게 이전하는 것은 기존 주주(삼성 계열사들)의 이익을 침해하지만, 에버랜드의 이익을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후 부당합병, 쪼개기 상장 등의 경우 (일반)주주의 이익이 침해되더라도 회사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는다면 이사에게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건이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다. 합병비율이 제일모직에 유리하게 정해져, 제일모직 주식을 많이 보유한 이재용 회장 오누이는 큰 이익을 얻은 반면, 삼성물산의 일반주주는 큰 손해를 보았다. 일성신약 등 삼성물산 주주들이 주주 이익이 침해됐다며 합병 취소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또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은 2020년 합병으로 이익을 얻은 이재용 회장 등 총수일가, 합병에 찬성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이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는데, 4년이 지나도록 재판이 지지부진하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법무장관 시절에 상법 개정에 관한 국회 답변에서 “에버랜드 사건 이후 주주가 아니라 회사를 피해자로 봐야 배임죄 구성이 가능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재계와 일부 전문가들은 주주이익과 회사이익의 구분조차 부정한다. 한국경제인협회(옛 전경련)를 대변하는 최준선 성대 명예교수는 언론 칼럼에서 “회사 이익과 주주 이익이 다르며, 양자의 관계가 등가라고 전제하는 발상부터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법원 판결마저 부정하는 억지·궤변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또 한경협은 지난 11일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보도자료를 내면서,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간 이해상충 문제와 그 해법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피했다. 이상훈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주주이익 침해 문제에 대한 대안도 내놓지 않고, 이러저러한 핑계로 반대만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말했다.
해외 입법 사례 없다?
한경협은 “미국 모범회사법과 영국·일본·독일·캐나다 등 주요국의 회사법에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은 회사에 한정된다”고 강조한다. 대다수 보수언론도 제대로 검증도 없이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세계적으로 입법 사례가 없다”고 앵무새처럼 보도한다. 하지만 이는 상당수 선진국이 회사는 물론 주주에 대해서도 이사의 충실의무를 인정하는 현실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미국 회사법의 양대축 중 하나인 미국 델라웨어주 회사법(102조)은 회사의 정관에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위반 책임을 감면하는 조항을 둘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모범회사법도 “이사가 회사와 주주를 공정하게 대할 의무를 위반한 경우 … 관련법과 소송에 따라 회사 또는 주주에게 책임을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영국 회사법(172조)도 회사의 이사는 전체로서의 주주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규정한다. 이상훈 경북대 교수는 “(재계와 일부 학계가) 영국 고등법원이 이사의 지위 자체만으로 주주에게 충실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고 강조하는 것은 원뜻을 왜곡한 것”이라며 “주주에게 권한이 없고 이사에게 권한이 부여된 상황에서는, 이사가 주주에 대해 직접 의무를 부담할 수 있다는 것이 확립된 판례법”이라고 말했다. 중국도 7월부터 시행되는 개정 회사법에서 이사의 책임을 크게 강화했다. 동사(이사)가 지배주주나 실제 지배권자의 지시에 따라 회사 또는 주주의 이익을 해칠 경우 손해배상을 책임지도록 했다.
그동안 금융감독당국과 학계, 경제전문기관은 여러 선진국이 주주에 대해서도 이사의 충실의무를 인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12일 "미국 델라웨어주 회사법과 모범회사법은 명시적으로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규정하고 있고, 영국·일본 등도 판례나 지침 등을 통해 주주의 이익 보호를 위해 노력하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밝혔다. 금융위도 2022년 12월 ‘주식양수도 방식의 경영권 변경 시 일반투자자 보호방안에 관한 세미나’에서 “미국의 경우 우리 상법과 달리 이사회는 회사 외 주주에 대해서도 충실의무를 부담한다”고 밝혔다. 경제개혁연대는 상법개정을 촉구하는 논평에서 “미국·영국 등 주요국은 법령 또는 판례법으로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인정하고 있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이드라인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OECD 기업지배구조 원칙은 “이사회 구성원은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선량한 관리자로서 회사와 주주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경협은 이에 대해 “일부에서 미국 델라웨어주 회사법을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가 포함된 근거로 제시하지만, 이는 회사 이익이 곧 주주이익이라는 일반론적 문구에 불구하다”며 아전인수식 주장을 계속한다. 한경협의 주장이 맞다면, 이복현 금감원장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다.
소송 남발·경영 혼선 우려?
재계와 보수언론은 소송 남발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제기한다. 한경협은 “소액주주는 배당 확대나 당장의 이익 분배를 요구하는 반면 지배주주는 여러 명목으로 이익을 회사에 장기간 유보할 것을 주장할 수 있다”면서 “이런 주주 간 이해충돌을 이사가 합치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로 인해 다양한 주주들로부터 충실의무 불이행을 빌미로 손해배상소송을 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보수언론도 이 때문에 경영 혼선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고, 과감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어렵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는 게 학계와 경제전문기관들의 진단이다. 이상훈 경북대 교수는 “이사의 충실의무는 지배주주 일가의 사적이익이 일반주주의 이익과 충돌하는 사안에 적용된다”면서 “총수의 사익추구만 없다면 상법 개정 내용이 발동될 일이 없다”고 말했다. 김우찬 고려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상법 개정이 되면 단순히 투자 실패로 인한 주가하락 같은 이유로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라면서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인정하는 미국의 경우 이해관계의 충돌이 없는 사안에는 경영판단의 원칙이 적용되어, 이사들이 주의 의무를 다했다면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준호 의원실도 “회사가 투자했다가 잘못되면 무조건 소송에 걸리고, 주주에게 물어줘야 하는 게 아니다”면서 “지배주주는 이익을 보고, 일반주주는 손해를 보는 일을 막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준호 의원은 지난 5일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추가한 상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상법 개정에 반발하는 재계를 달래기 위한 카드로 형법상 배임죄 폐지론을 제기했다. 배임죄로 인해 이사회의 의사결정이 과도하게 형사처벌과 수사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배임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이 그 임무를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하는 죄를 말한다. 재계는 오래전부터 배임죄 적용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처벌수위가 높아 기업활동을 저해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지배주주의 권한 남용을 견제할 민사적 수단이 미흡한 우리 현실에서 배임죄 폐지는 상법 개정 취지를 유명무실하게 만들 위험성이 크다는 우려가 많다. 한국은 적은 지분을 보유한 지배주주 일가가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고 경영승계를 위해 계열사를 동원하는 행위가 빈번하기 때문에 이를 통제하는 배임죄를 폐지하기는 이르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도 2015년 전원일치 의견으로 배임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했다. 배임죄 폐지론이 상법 개정을 오히려 어렵게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여당이 이사 충실의무 강화와 배임죄 폐지를 패키지로 추진하더라도, 배임죄 폐지에 부정적인 더불어민주당이 수용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야당이 상법 개정안만 단독처리할 경우 윤석열 대통령이 여야 합의가 안됐다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한경협은 이 밖에도 상법 개정 반대 이유로 이사는 회사가 임용한 대리인이어서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없고, 주식회사의 기본원리인 자본 다수결 원칙을 훼손한다는 등 다양한 주장을 한다. 심지어 일부 보수언론은 외국펀드, 시민단체, 국민연금(정부) 등의 경영개입 위험이 있다는 주장까지 편다. 하지만 대부분 무리하고 억지스러운 주장일 뿐이다. 다수결 원칙 훼손 우려가 대표적이다. 상법 개정의 취지는 모든 소액주주의 개별 이익을 보호하려는 게 아니다.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이해상충이 있을 때 지배주주의 이익만을 위해 의사결정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를 다수결 원칙의 훼손으로 몰아가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재계는 규제개혁을 명분으로 정부와 국회에 끊임없이 입법 건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핵심인 지배구조 개선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1400만명에 이르는 국내 개미투자자들로서는 앞으로도 계속 지배주주 이익을 위해 희생만 하라는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개인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을 팔고 미국 주식을 사들이는 ‘한국증시 대탈출’이 더욱 가속화할 위험성이 크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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