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의 恨은 살아남은 자의 고통...연극 ‘연안지대’

김형주 기자(livebythesun@mk.co.kr) 2024. 6. 2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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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장례 의식은 산 사람의 숙제다.

'연안지대'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산 자가 짊어지는 죽은 자의 고통을 시각화한 것으로 읽힌다.

죽은 자의 기억이 산 자의 삶을 옭아매는 것을 나타내듯 '연안지대'에는 죽은 인물들이 계속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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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극단 연극 ‘연안지대’
죽은 父, 고향 땅에 묻기 위해
시신 짊어지고 떠난 아들
생존자 옭아매는 망자의 恨
공연 내내 시신 드는 걸로 표현
3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망자의 한(恨)과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그린 서울시극단 연극 ‘연안지대’의 한 장면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장례 의식은 산 사람의 숙제다. 살아남은 자들은 망자가 남긴 한과 사별의 슬픔을 짊어진다. 죽은 이를 온전히 보내주지 못한 사람은 응어리진 기억을 안은 채 여생을 살아간다.

서울시극단이 레바논 출신 캐나다 작가 와즈디 무아와드의 전쟁 4부작 중 첫 번째 작품 ‘연안지대’(연출 김정)를 공연중이다.

“아버지를 아무 데나 묻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아버지를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가 그분의 영혼이 쉴 수 있도록 해드리겠다고 맹세합니다.”

연극은 망자가 남긴 기억의 무게와 살아남은 이들의 한풀이 과정을 그린다. 이름 모를 여인과 정사를 벌이던 중 아버지 이스마일의 부고를 들은 윌프리드(이승우)는 아버지를 고향 땅에 묻어드리기 위해 시신을 들고 떠난다. 그러나 전쟁이 휩쓸고 간 이스마일의 고향에는 새로운 시신을 매장할 땅이 없고, 윌프리드는 참상에서 살아남았지만 죽은 이들의 한을 짊어진 인물들을 만나 함께 장지를 찾아 떠난다.

망자의 한(恨)과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그린 서울시극단 연극 ‘연안지대’의 한 장면
‘연안지대’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윌프리드는 작품 내내 천으로 감긴 이스마일의 시신을 양손으로 든 채 여정을 이어간다. 산 자가 짊어지는 죽은 자의 고통을 시각화한 것으로 읽힌다. 윌프리드는 “너무 무거워. 죽을 것 같아” “더 이상 못 가겠어”라고 부담을 호소하면서도 시신을 내려놓지 않는다. 윌프레드와 함께하는 시몬(윤현길), 아메(이미숙), 사베(공지수), 마시(정연주) 등이 품은 상처들도 무대 위 바위산을 중심으로 총소리, 포격 소리 등과 함께 펼쳐진다.

윌프리드 일행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조제핀(조한나)이 전화번호부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그들의 죽음을 한명 한명 책에 기록하는 모습은 망자를 기억하기 위한 생존자의 몸부림으로 느껴진다. 그가 여정 내내 두꺼운 책들을 낑낑대며 짊어지는 모습은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감과 비애를 짙게 자아낸다.

“빼앗기거나 불태워지면 안 돼...내가 영원히 짊어질 수는 없어. 무거워, 너무 무거워.”

죽은 자의 기억이 산 자의 삶을 옭아매는 것을 나타내듯 ‘연안지대’에는 죽은 인물들이 계속 무대에 오른다. 윌프리드가 끌어안은 시신과 별도로, 죽은 이스마일(윤상화)이 등장해 인물들에게 말을 걸고, 윌프리드를 낳다 죽은 어머니 잔(최나라)과 젊은 시절의 이스마일(송철호)은 현재의 윌프리드로 이어지는 그들의 비극적 이야기들을 푼다.

망자의 한(恨)과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그린 서울시극단 연극 ‘연안지대’의 한 장면
‘연안지대’는 감정의 톤을 조절하는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연극은 경쾌한 드럼 연주와 안무로 시작했다가 서정적 피아노 연주를 배경으로 비장한 서사를 펼친다. 비극적 내용이 펼쳐지는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희극적 요소들은 120분의 공연 시간 동안 관객을 처지지 않게 한다. 여러 차례 영화감독(강신구)이 등장해 마치 영화 촬영 현장인 듯 윌프리드에게 디렉팅을 하는 장면은 윌프리드의 이야기를 극중극(극 안에서 이뤄지는 극)으로 만들어 관객과 인물의 거리를 조절하는 효과를 낳는다. “윌프리드, 드라마틱한 포즈로 시신을 안아 줘. 자...스탠바이” “감독님도 나가주시겠어요?” “뭔 소리야? 이게 가장 중요한 씬인데” “저 혼자 있고 싶다고요.”

연극의 백미는 연안지대에 도착한 윌프리드가 이스마일을 매장하기 전 시신을 닦는 장면이다. 그는 부패한 아버지의 시신을 꺼내 물과 천으로 씻긴다. 구겨진 사지를 펴고 고깃덩이처럼 변색된 표면을 정성스레 어루만진다. 죽은 자가 살아남은 이에게 남긴 한을 말끔히 닦아내려는 것처럼.

망자의 한(恨)과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그린 서울시극단 연극 ‘연안지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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