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정원] 한쪽 무릎을 꿇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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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탈고 후엔 일주일에서 보름쯤 제주에 머물곤 한다.
"밭에 한쪽 무릎을 꿇으면/ 거기서부터 사람은 흙으로 이어진다/ 사람이 흙과 이어지면/ 그것이/ 생명의 안식."
운 좋게 비가 오면 낫을 든 채 한쪽 무릎을 꿇고, 흙과 함께 젖어보려 한다.
미리 상상하지 말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한쪽 무릎 아니 양쪽 무릎 전부를 꿇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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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탈고 후엔 일주일에서 보름쯤 제주에 머물곤 한다. 구상과 초고와 퇴고를 거치면서 기억하고 또 기억한 이야기를 잊기 위한 여행이다. 충분히 망각하지 않으면, 다음 작품에 예전 단어와 문장과 장면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일종의 자기 표절이다.
이번에도 제주로 건너갔지만, 나흘만 걷고 섬진강 들녘으로 돌아왔다. 지독한 가뭄 탓이다. 일기예보에선 주말에 적어도 반나절은 전남 곡성에 비를 뿌린다고 했다. 그러나 먹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만 불었을 뿐,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서둘러 광주행 비행기를 탔다.
100평 남짓한 텃밭에서 상추와 감자와 옥수수와 콩과 토란에 물을 주다보면, 두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 차례 물을 줘야 농작물이 말라 죽지 않고 여름을 버틸 수 있다. 밭두렁에 앉아 냉수 한잔 마시는 것도 미안할 정도다.
가뭄에 힘겨워하는 사정은 논도 다르지 않다. 농부들은 어둑새벽부터 저물녘까지 논두렁을 오가면서 물꼬를 살펴 제 논에 물을 댔다. 옆 마을에서 물싸움이 심하게 벌어졌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비 한번 내리면 해결될 일이건만, 6월 들어 비 소식이 전혀 없다.
가뭄 속에서도 풀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물을 주지 않을 때도, 허리를 숙인 채 작은 낫을 쥐곤 풀을 베어낸다. 특히 감자를 심은 이랑의 키 큰 풀들은 협공하듯 감자 줄기를 둘러싸고 압박한다. 마음 같아선 뿌리까지 뽑고 싶지만, 그러다가 흙에 구멍이라도 나서 감자들이 덩달아 다칠까 걱정이다.
야마오 산세이 시선집 ‘나는 숲으로 물러난다’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시 제목이 마침 ‘감자밭에서’다. “밭에 한쪽 무릎을 꿇으면/ 거기서부터 사람은 흙으로 이어진다/ 사람이 흙과 이어지면/ 그것이/ 생명의 안식.”
전남 광양 청소년문화센터 어린이 32명과 올해 마지막 모내기 실습을 했다. 어린이들은 처음 들어간 논에서 한걸음 떼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논흙에 발이 푹푹 잠기는 것이다. 나는 빨리 발을 빼려 애쓰지 말고, 발바닥과 발등과 발목과 종아리로 흙을 천천히 느껴보라 충고했다. 농부는 흙과 이어진 사람이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어린이들은 논에서 걷는 법을 곧 터득했다. 모를 나누고 심는 자세 역시 침착하고 진지했다. 엉덩방아를 찧거나 앞으로 쓰러져 울음을 터뜨린 어린이는 한명도 없었다. 흙과 모를 만나 재미있고 신기했다며 다 같이 웃었다.
내주에 다시 비 예보가 있다. 그날 비가 오든 오지 않든 텃밭에 나갈 예정이다. 운 좋게 비가 오면 낫을 든 채 한쪽 무릎을 꿇고, 흙과 함께 젖어보려 한다. 이 가뭄의 끝을 나는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할까. 미리 상상하지 말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한쪽 무릎 아니 양쪽 무릎 전부를 꿇는 것이 먼저다. 기도라면 기도고 기쁨이라면 기쁨이겠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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