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원 받으려 포천서 인천으로··· 준비되지 않은 노인 공화국 ‘민낯’
76세 이상은 2명 중 1명 꼴로 빈곤
연금으론 생활 어려워 다시 일터로
일자리 바늘 구멍 “죽고 싶다” 절규
무료 급식소·돈 주는 교회 '오픈런'
정치권, 심각성 알면서도 개혁 늑장
편집자주
인구소멸과 기후변화 등으로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5년 단임 정부는 갈수록 단기 성과에 치중해 장기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정권교체마다 전 정부를 부정하는 정치적 갈등으로 정책적 혼선도 가중됩니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런 문제를 진단하면서 구조 개혁을 이루기 위한 초당적 장기 전략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4년 전, 구정 바로 다음 날이었죠.”
임종익(69)씨는 그날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2020년 1월 26일, 그는 혼자 방바닥에 누워 TV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설날 특선 영화와 특집 프로그램이 가득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냉기 가득한 방 구석에서 이불로 온몸을 감싼 채 잠을 청했다. 몇 시간쯤 지나 눈을 떠보니 얼굴 한쪽에 감각이 없었다. 구안와사(안면 신경마비)였다. 거울에는 돈도 가족도 없이 20㎡(6평) 남짓 원룸에서 설을 쇠다 입이 돌아간 노년의 남성이 보였다.
임씨는 노년의 삶이 이렇게 비참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젊은 시절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살았다. 고교 졸업 후 세탁소 관리직, 제철소 생산직 등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이렇게 모은 종잣돈으로 30대부터 원단 사업을 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음식점으로 업종을 바꿨다.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고, 아내와는 일찌감치 갈라섰다. 중년에는 막노동꾼이 됐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느라 노후 대비는 언감생심. 그래도 40년 이상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아왔는데, 남은 것은 가난뿐이었다. 구안와사는 노년의 고통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출발 신호 같았다.
그래도 그때는 일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4년이 지난 지금은 인력사무소 어느 곳도 일흔을 바라보는 임씨에게 일을 주지 않는다. 그나마 지인의 도움으로 소규모 빌라 공사 현장을 나가며 근근이 버텨왔는데, 올해부턴 이것조차 뚝 끊겼다. 구청에 신청한 공공근로는 줄줄이 낙방. 얼마 전에는 구청 소개로 서울 대학병원 청소직에 지원했는데 답이 없었다.
매달 수입은 기초연금 34만 원이 전부다. 그 돈으로는 관리비와 전기·수도세, 가스비, 통신비, 보험료 같은 고정비도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는 모아둔 돈으로 하루 두 끼만 먹으며 버텼다. 취미인 등산도 끊었다. 햇빛 한 줌 없는 원룸에서 하루 종일 TV만 보는 ‘자가 격리’를 한 지도 벌써 한 달째다. 이달 10일 휴대폰으로 은행 애플리케이션(앱)을 열었더니 끝이 보였다. 화면에는 ‘2,0XX,XXX원’이 써 있었다. 두세 달이면 바닥날 돈이었다. 뒷목이 뻐근했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있던 황재우(74)씨도 휴대폰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06/04 잔액 1만2,780원’. 국민연금 48만 원과 부부 기초연금 52만 원 등 총 100만 원이 들어온 게 지난달 25일. 이 돈은 노(老)부부의 생명줄이었다. 월세, 공과금 등을 내고 남는 돈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빠듯했지만 그래도 40대 딸한테 손 벌리지 않고 잘 버텨왔다. 그런데 이번 달은 어찌 된 일인지, 불과 열흘 만에 잔고가 바닥났다.
예상치 못한 변수 탓이었다. 아내는 허리 통증을 심하게 호소했다. 황씨도 최근 건강검진에서 위암 판정을 받았다. 전공의 사직 여파로 지역 병원은 외래진료 예약이 쉽지 않았지만, 서울 대학병원은 여유가 있었다. 노부부는 대구와 서울을 SRT(수서고속열차)로 오가기 시작했다. 경로우대 혜택을 받아도 왕복 교통비만 10만 원이 넘었고, 병원비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돈이 나올 구멍은 없었다. 황씨는 30년 이상 시내버스를 몰다 2012년 62세에 정년퇴임한 뒤 10년 가까이 노후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했다. 하지만 일흔 넘은 노인을 받아줄 곳은 더이상 없었다. “차라리 위암인지 몰랐다면 돈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이 그냥저냥 살다가 죽었을 텐데…” 그는 자책했다.
39.3%. 2021년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이다. 66세 이상 노인 10명 중 4명은 소득이 중위소득 절반에 못 미친다는 의미다. 18~65세 빈곤율(10.6%)과 비교하면 4배가량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7곳 중 노인 빈곤율과 18~65세 빈곤율 간 격차가 20%포인트 이상 차이 나는 곳은 한국과 에스토니아뿐이다. 이웃 나라 일본은 18~65세(13%)와 노인(20%) 간 빈곤율 격차가 크지 않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선 임씨나 황씨 사례처럼 중장년까지 평범하게 살다가 은퇴 후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이가 많다. 이는 은퇴 이후 노년층의 주요 소득원인 공적 연금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은 자영업자나 비정규직도 많고, 연금액 자체도 낮다. ‘용돈’ 연금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노인들이 다시 취업전선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노화, 질병 등의 이유로 일하기 어려운 노인들은 생활고와 사회적 고립으로 극단적 선택에 내몰리기도 한다. 노인자살률(인구 10만 명당 46.4명)이 OECD 1위를 기록하는 이유도 빈곤 문제와 무관치 않다. 그럼에도 역대 정부는 모두 연금 개혁을 뒤로 미루거나 용두사미로 끝냈다.
76세 이상 2명 중 1명이 빈곤층
초(超)고령 노인의 빈곤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21년 66~75세 빈곤율은 30.5%인 반면, 76세 이상은 51.4%에 달한다. 이승희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지난해 9월 ‘소득과 자산으로 진단한 노인 빈곤과 정책방향’ 보고서에서 노년층이 보유 자산을 토대로 임대료 수입을 올린다고 가정하고 빈곤율을 계산했다. 그 결과, 1930년대 후반 출생자의 빈곤율은 45.9%, 1940년대 전반 출생자는 37.2%로 집계됐다. 70대 후반~80대 중반 노인 상당수는 자산도, 소득도 없는 빈곤층이라는 의미다.
현실은 더 비참하다. 이달 15일 오전 9시 30분, 인천 계양구의 한 교회 앞에는 50m가 넘는 줄이 늘어섰다. 이 교회는 매주 토요일마다 예배에 참석한 65세 이상 노인 500여 명에게 선착순으로 현금 5,000원을 주고 있다. 이런 내용이 입소문을 타면서 어르신들이 ‘오픈런’에 나선 것이다. 한 80대 남성은 오전 7시 경기 군포역에서 전철을 타고 수차례 환승한 끝에 오전 8시 30분쯤 교회에 도착했다. 교회 관계자는 “충남 아산과 경기 포천에서 오는 분들도 있다”고 전했다.
노인들이 교회로 몰려든 이유를 물어봤다. 부부 기초연금 52만 원으로 버티는 김모(81)씨는 “평일엔 집에서 김치와 밥으로 끼니를 때우는데, 토요일엔 짜장면 한 그릇 먹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왔다는 박모(80)씨는 인천 지하철 1호선 작전역에서 내려 교회까지 1.4km를 걸어온 탓인지 숨을 헐떡거렸다. 박씨는 “자식한테 손 안 벌리려고 5,000원을 꼬박꼬박 모으고 있다. 이 돈은 쓰지 않을 거고, 점심은 집에 가서 먹을 계획”이라고 했다.
55세 이상 일하는 노인들로 이뤄진 노동조합 노년유니온의고현종 사무처장은 “4년 전 기초연금만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던 73세 노인이 박카스병에 농약을 담아와 ‘일자리를 연결해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농약을 마시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차라리 죽고 싶다” 고령자들의 외침
가난한 노인들이 겪는 문제는 경제적 어려움만이 아니다. 사회적 고립과 우울증 같은 정서적 문제도 심각하다. 30년간 제지업계 노동자로 살아온 서모(66)씨는 5㎡(1.5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혼자 살고 있다. 수입은 국민연금 84만 원과 기초연금 18만7,000원이 전부다. 월세와 당뇨 관련 약값과 병원비 등을 지출하면 세끼를 챙겨 먹기도 빠듯하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값싼 오트밀을 물에 불려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서씨는 “여윳돈이 없어 친구 관계를 다 끊었다”며 “사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털어놓았다.
있지만, 없는 존재? 의도적 방임
‘저소득·저자산’ 노인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으로는 기초연금 인상이 꼽힌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 등은 현 가입자부터 적용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정부 자문기구인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전체 노인 70%(최대 33만 원)가 받고 있는 기초연금 대상을 저소득층으로 좁히고 금액은 늘리는 방향의 개선안을 권고했다. 지금은 매달 400만 원을 버는 독거 노인도 기초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 이런 사람에게 주느니 진짜 어려운 노인에게 10만 원이라도 더 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지난해 10월 국회에 제출한 연금 개혁안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대통령 공약대로 기초연금을 40만 원으로 인상하겠다는 내용만 담겼다.
이는 수급자가 700만 명에 육박하는 기초연금 대상을 축소하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국민연금 월평균 수급액이 62만 원에 불과한 상황에서 기초연금만 올리면 “누가 10년, 20년 꼬박꼬박 국민연금에 보험료를 내겠는가”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정부 일각에선 1960년대생이 노인 연령대에 진입하면 “빈곤 문제가 완화될 것”이라는 낙관론도 내놓고 있다.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안정된 직업을 갖고, 상당한 자산을 축적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노후 대비가 부족한 1940년대생 및 이전 세대가 퇴장하고 1960년대생이 노인이 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연금개혁 논의에서 당면한 노인 빈곤 문제가 심각한데도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이상학 노후희망유니온 정책위원장은 “정부와 국회 모두 노인 빈곤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지만 외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문제를 계속 방치하면 더 큰 재앙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래 세대 또한 구조적으로 노년에 가난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10년, 20년 뒤에도 국민연금 수급액이 노후 생계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문제의 본질은 동일하다. 우리나라 직장인이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나이는 49.3세. 국민연금은 40년 가입 시 평균소득의 40%(소득대체율 40%)를 지급하도록 설계돼 있는데, 이 기간을 꽉 채우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당연히 연금 수급액도 적다. 게다가 곧 노년기에 진입하는 1960년대생은 부모와 자녀의 ‘이중 부양’ 부담을 떠안은 샌드위치 세대이기도 하다. 재단법인 '돌봄과 미래'가 지난달 8~15일 1960년대생 98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응답은 62%에 그쳤다.
고현종 사무처장은 “현재 59세 친구 스무 명 중 다니던 직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고 했다. 이어 “현재 국민연금 수급자 월평균 수급액이 60만 원인데 이는 평균일 뿐, 대부분 40만 원 이하”라며 “미래 노인 세대 또한 비슷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상학 위원장도 “노후 빈곤 문제는 노동시장을 그대로 반영한다. 중소기업·비정규직 근로자들은 현 노인들이 겪고 있는 빈곤 문제를 똑같이 겪을 가능성이 크다”며 “경제·사회 전반의 구조 개혁을 통해 잠재 성장률을 높이고 연금 개혁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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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이중위기 맞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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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정치가 정권 한계 넘어서려면
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송주용 기자 juy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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