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길 들이기와 길 들지 않기
부당한 길 들이기 멈추고 길 들지 않음을 증명해야
“사관(史官)은 오늘 일을 기록하지 말라”. ‘왕이 행한 일을 기록하지 말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기사이다. 성군이라는 세종도,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는 태종도 자신의 오점이 될 만한 일에 대해 기록삭제를 명했지만 사관의 붓을 막지 못했다. 왕이 기록하지 말라고 한 사실까지 실록에 남겼다. 세계문화유산인 실록 연구자들은 기록정신이 조선을 지탱했다고 평가한다. 사실(事實)의 기록은 그 자체로 비판이며, 성찰이고, 역사다.
예나 지금이나 기록에서 최대 위협은 권력이다. 권력은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속성이 있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와 사법권력, 심지어 권력화한 기업과 이익집단은 언론의 기록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윤석열 정부는 물론이고 역대 정부가 집권과 함께 방송장악, 언론 줄 세우기에 나선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언론의 핵심기능은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다. 권력이 국민과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기 때문이다. 어느 앵커의 말처럼 스스로 권력화한 ‘경비견(가드독)’이나 권력에 엎드린 ‘애완견(랩독)’ 행태는 언론의 본령을 벗어난 일이다.
지난달 국경없는 기자회(RSF)가 발표한 2024년 세계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62위를 기록했다. 문재인 행정부 5년 차 때 43위에서 2년 만에 무려 19계단이나 떨어졌다.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는 성공한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오래 가기 어렵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언론을 잠시 누를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용수철처럼 솟구치는 그 이상의 반발력을 각오해야 한다.
윤석열 행정부에서 수많은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압수수색과 수사가 진행됐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과 정부가 불편한 사실을 보도한 언론과 언론인을 탄압하는 처사라고 반발한다. 윤 대통령과 정부여당에 대한 날선 비판이 보수언론에까지 옮겨 붙는 최근 상황을 단순히 ‘보수생존론’ 때문으로 보는 것은 일견에 불과하다. 언론의 속성인 비판기능을 가볍게 본 오인에 가깝다. 이념을 떠나 잘한 것과 못한 것의 구분이 명확한 일이 훨씬 더 많다. 언론은 그런 잘못에 대해 관대하지 않다. 이를 가드독 행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이라면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한다. 언론은 민심을 거슬러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에 불거진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애완견’ 발언도 언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어떤 이는 언론이 정치를 비평하듯이 정치가 언론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고 항변한다. 그럴 듯 해보이지만 언론의 권력 감시기능에 대해 동의한다면 틀린 말이다.
이 대표는 사실상 국회를 장악한 제1당 대표이다. 동시에 제1당의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유력 정치인이다. 이 대표는 ‘여의도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의 권력자다. 이번에는 국민의힘이 ‘희대의 망언’이라고 이 대표를 겨냥했다. 야권 성향의 언론사들까지 나서 이 대표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선출직 공무원이다. 각각 행정과 입법이라는 영역에서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권한을 행사하는 권력이다. 이 대표의 언론에 대한 공개적 비난이 용인된다면 윤 대통령과 정부의 언론탄압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게 된다. 윤 대통령이 불편해 하는 언론에 공권력이 작용하듯이 이 대표의 애완견 발언 이후 제1당에서 언론과 언론인을 겨냥한 막말이 이어졌다. 이 대표의 호위무사를 자처한 의원들의 행태에서 언론에 대한 적대감이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언론 재갈물리기에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위협이 묻은 의심마저 든다. 이 대표가 한국지역언론인클럽과 기자협회 등 언론인 단체의 항의 성명이후 사과한 것은 다행이지만 홍위병들의 자성은 없다.
이 대표는 SNS에 올린 사과 글에서 언론을 애완견에 빗댄 앵커 브리핑을 공유했다. 이 대표는 ‘애완견’을 언론계 인사는 해도 되지만, 나는 말하면 안된다는 것이냐는 사족을 달았다.
정확히 그렇다. 언론 내부에서 말하면 자성이지만 권력이 공개적으로 언급하면 부당한 간섭이 될 수 있다. 이 대표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해도 일부 의원들이 언론에 대한 적개심을 행동으로 옮길 태세다. 앵커 브리핑은 언론을 향해 ‘길 들지 말자’는 결론을 맺고 있다. 행정권력이든, 입법권력이든 언론을 길 들이려는 시도를 멈추라는 뜻이기도 하다. 길 들이지 않으면 길 들지 않는다. 어느 쪽도 언론을 자신의 애완견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길 들이려 해도 길 들지 않는다. 결국 언론이 길 들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한다. 언론 내부의 자정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지 다시 점검할 필요도 있어보인다. 언론도 역사 앞에서 기록되는 존재일 뿐이다.
손균근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한국지역언론인클럽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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