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다시 아날로그의 세계를 생각한다

조원희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비프 운영위원장 2024. 6. 2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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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희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비프 운영위원장

부산 광안리에 아마도 전국 최고였던 LP바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수영구 민락동에 위치했던 그 곳은 LP의 수량은 둘째치고 세계의 희귀 음반이 가득했으며 오디오 시스템 역시 높은 수준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곡의 능력이었다. 재즈와 클래식을 기반으로 록 음악에서 팝이나 가요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았다. 여느 LP바에서 들을 수 없는 음악들이 흘러나왔고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뻔한’ 선곡은 좀처럼 하지 않는 곳이었다. 아쉽게도 팬데믹의 흉포에 밀려 폐업하고 얼마 전 다른 도시에서 영업을 개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곳은 필자처럼 ‘나이 든’ 고객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인스타그램에 좋은 사진을 올릴 수 있는 곳으로 이름나 젊은 손님도 많이 찾았다. 그들의 생애주기 안에 LP가 유효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LP바를 통해 레코드가 플레이되는 과정과 메커니즘을 체험할 수 있었다.

디지털 음원도 아니고 CD의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LP는 영구히 그 생명을 잃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아니었다. 커다랗고 무거운 데다 관리마저 까다롭고 이제 가격도 비싸진 이 매체는 21세기의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얼마 전 밴드 ‘모임 별’은 ‘우리 개’라는 제목의 신보를 발표했다. 이 음반은 근래의 방식인 디지털 음원 릴리스는 물론 LP로도 나왔다. 최근 신보를 내는 기존 음악인은 물론 신인까지도 LP를 발매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디지털의 시대, 물리적 움직임을 통해 음악을 재생하는 매체가 지니는 가치는 여러 가지다. 하나만 꼽자면 특히 음악을 감상하는 방법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쉽게 넘길 수 없다’는 점이다. CD로부터 현재의 디지털 음원까지, ‘다음 곡’으로의 전환이 간단한 클릭 한 번으로 해결된다. 하지만 LP는 다르다. 극히 희귀한 리니어 트래킹 방식의 턴테이블을 제외하면 레코드의 소리골을 찾아 손으로 직접 카트리지를 옮기는 노력을 해야만 다음 곡을 들을 수 있다. 이 귀찮은 방해 덕분에 놀랍게도 음반 전체에 집중하게 된다. LP의 시대에는 앨범 전체가 하나의 메시지를 품고 있는 ‘콘셉트 앨범’이 많았다. 물론 단일 싱글로도 위대한 음악적 성취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풀 렝스’의 한 음반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더욱 숭고한 일이다. CD의 시대가 되면서, 쉽게 다음 곡으로의 전환이 가능해지면서 음악인들의 창작 방식이 조금은 가볍게 바뀐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새 음반을 LP로 발매하는 아티스트들은 ‘모임 별’처럼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의 시대에 아날로그가 더 높은 위상을 가지는 것은 음악에서만 생기는 현상이 아니다. 영화에서도 본다. 2009년을 기점으로 한국에서 필름으로 영화를 만드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필름의 물성적 한계를 뛰어넘은 디지털 기술은 실제로 영화라는 예술을 크게 발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최종 상영 단계가 아니라 촬영 과정에서 필름을 사용한다는 것은 영화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예술적 특성을 공고하게 만든다. 매년 4월 미국에서 열리는 전자 미디어 발표회 ‘NAB SHOW’에서 올해는 흥미로운 연구가 발표됐다. ‘오펜하이머’가 작품상을 받은 제 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오른 작품 중 약 44퍼센트 정도가 필름으로 촬영됐다는 것이다. 언제나 필름을 고수해 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당연하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한국계 신인 감독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 역시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시간과 공간만 주어진다면 재 촬영의 기회가 이론적으로는 무한한 디지털 매체와 달리 필름의 유한성은 현장에서 창작자와 배우를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또한 필름이 지닌 고유의 화질은 어떠한 디지털 후반 작업으로도 정확히 재현하기 힘들다. 최근 우리가 열광했던 작품 중 필름으로 촬영된 것으로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스코세이지의 ‘플라워 킬링 문’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 등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은 물론 조던 필의 ‘노프’나 존 크래신스키의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같은 공포영화들도 있다. 디지털 시대, 창작 과정에서 다시 아날로그를 채택한 이들이 각광받고 있는 현상은 매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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