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韓이 역전한 1인당 국민소득… 엔저에 울고 웃는 日
얼마전 1인당 국민소득(GNI)으로 한국이 처음 일본을 넘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유학하던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이 떠올라 격세지감을 느꼈다. 당시 엔화 가치가 급등해 유학생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2007년에는 100엔당 750원 정도였지만, 2008년에는 1500원 이상까지 올라갔다. 엔고는 일본 상품이 해외에서 비싼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일본의 무역수지를 악화시키는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지금 일본은 세계 금융 위기 때와 정반대 상황을 겪고 있다. 코로나 위기가 끝나고 최근 수년간 엔화의 가치가 급작스럽게 떨어지면서 반대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호주 같은 외국에서 일하면 일본에서 일하는 것보다 두배 더 잘 벌고, 일본 내 젊은이들이 열심히 일해도 외화 기준으로는 수입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적다는 뉴스가 나온다.
또한 일본인들이 외국에 여행 가기도 쉽지 않게 됐다. 휴가 시즌에 하와이에 간 일본인들이 물가를 걱정해 숙소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일본에서 쌀이나 식재료를 가져간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근로자들은 예전과 같은 금액의 엔화를 송금하더라도 본국 통화로는 금액이 줄어들어 불만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일본은 코로나 이후부터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물론 이는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과 관련해 일본이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은 코로나 이전에 30년 가까이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는 것이다. 매년 물가가 올랐던 대부분 나라와 다르게 일본 경제는 오랜 기간 많은 재화 및 서비스의 가격이 고정돼 있었다. 따라서 최근의 인플레이션은 30년 만에 겪는 커다란 변화다. 20여 년을 일본에서 살고 있는 필자는 이발소에 가서도 레스토랑에 가서도 새로운 가격 표시에 깜짝 놀라게 된다.
또 다른 일본만의 고유한 특징은 엔저로 인한 추가 인플레이션이라 할 수 있겠다. 2021년 말부터 미국을 필두로 주요 선진국들은 물가를 낮추기 위해 금리 인상을 단행했지만, 일본에서는 아직도 제대로 된 금리 인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에 따라 엔화 가치가 계속 하락했다. 이는 당연히 수입 물가를 올리게 된다. 집 앞 수퍼마켓에서 콜라 500ml 한 병을 10년 이상 100엔 이하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100엔이 넘어 100엔짜리 동전으로는 살 수 없게 됐다.
인플레이션이 일본에 나쁜 영향만 준다고는 볼 수 없다. 디플레이션 탓에 저체온증을 겪던 일본 경제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줬다고 볼 수 있다. 임금이 꽤 올랐다.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에 따르면 2024년 슌토(봄에 이루어지는 임금협상)를 통한 올봄 평균 임금 인상률이 5.25%였다. 이는 30년 사이 가장 높은 수준의 인상률이다. 2019년 도쿄의 최저임금은 1013엔이었는데, 2023년에는 1113엔까지 올라갔다.
현재 일본은 외국인 관광객 급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일본의 상품이나 서비스가 저렴하다고 느낀 외국인들이 몰려와 수요를 늘리기 때문에 일본 경제에는 좋은 신호다. 필자의 직장이 있는 시부야역 인근에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거리든 음식점이든 바글바글하다. 관광산업에 종사하는 일본인들의 수입이 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엔화의 장기적 약세의 원인 중 하나는 일본 기업 및 개인들의 해외투자 확대라고 볼 수 있다. 엔화가 아닌 외화 수요가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에 따르면 일본의 대외순자산은 2023년 말 기준으로 471조3061억엔(약 4100조원)이다. 한 해 사이 12.2%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일본은 33년 연속 세계 최대 순채권국 자리를 지켰다.
엔고 때 이뤄진 많은 해외 투자 자산은 최근 엔저 시기를 맞아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엔화로 환산한 기준으로 본다면 일본의 자본가들과 기업의 자산이 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엔저에 적극적인 대처를 하고 있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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