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홍의 스포트라이트]박세리와 아버지의 눈물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2024. 6. 23.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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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 박세리희망재단 이사장이 18일 서울 강남구 스페이스쉐어 삼성코엑스센터에서 부친 관련 기자회견을 하던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시스

딸에게 달려간 아버지가 먼저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고, 그런 아버지를 따라 딸도 울기 시작했다.

1998년 7월 7일 미국 위스콘신주 쾰러의 블랙울프런 골프장(파71)에서 열렸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메이저대회 US 오픈. LPGA 사상 최장 연장 기록을 쓰면서 장장 5일간 92홀에 걸친 대혈투의 막을 내리는 순간, 20세 9개월의 나이로 당시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던 박세리와 아버지 박준철 씨였다. 지난날의 고난과 회한과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은 극복의 기쁨과 감격이 뒤섞였던 눈물이었다.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하며 쫓고 쫓기는 가운데 모두가 “끝났다” 여겼을 정도로 위기에 몰렸다가 살아난 뒤 기어코 뒤집은 경기였다. 연장전에서 박세리는 태국계 미국인 제니 추아시리폰의 기세에 밀려 5번홀까지 4타 차로 뒤지며 패색이 짙었으나 저력의 추격전을 펼치며 17번홀까지 동타를 이루었다. 하지만 18번홀에서 박세리의 티샷이 연못 가장자리에 걸치며 승부는 그대로 끝나는 듯했다. 모두가 패배를 예감한 그때 박세리는 양말을 벗고 연못에 들어가는 희대의 장면을 연출하며 최대의 위기 속에서 최고의 샷을 날려 역전의 기틀을 마련했고 마침내 승부를 서든데스로 치러진 재연장전으로 몰고 갔다. 박세리는 두 번째 홀에서 5.5m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며 길고 긴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온 국민이 고통받고 있던 시기였다. 포기할 줄 모르는 박세리의 투혼은 가수 양희은의 목소리로 불려진 노래 ‘상록수’와 결합돼 공익광고로 제작됐다.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란 가사는 그때 국민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였다.

아버지 박 씨에게도 남다른 우승이었다. 박 씨는 군용텐트를 치고 신접살림을 차려야 했을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고 주먹 세계를 오가며 노동과 접시 닦이 등으로 힘들게 생활하면서도 어린 박세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우기 위해 그의 인생을 걸었다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혔었다. 스스로 코치가 되어 눈비 오는 날이면 악조건 속에 적응시키기 위해 일부러 더 훈련을 시켰고, 딸의 담력을 키우기 위해 묘지 주변에 텐트를 치고 함께 지내는가 하면 딸의 근력과 정신력과 기술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골프 입문 초창기에 가난하고 이름 없는 부녀(父女)를 향한 무관심과 냉대를 아버지와 딸은 함께 뚫고 지내왔었다.

그날 이 모든 걸 뚫고 영광을 함께하며 울었던 아버지와 딸은 그러나 지금 갈등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최근 박세리가 아버지의 채무 및 사문서 위조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모종의 사업을 위해 박세리희망재단의 도장을 몰래 제작해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내가 아버지니까 대신 나서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아버지의 입장이 보도되기도 했다. 만일 그랬다면, 어려서부터 딸의 인생을 기획하고 뒷바라지하며 이끌었다는 그 생각과 자부심이 아직도 딸의 인생에 크게 관여할 수 있다는 데까지 이르게 한 것은 아닌지. 이미 세계적 스타로 정점을 찍은 딸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명확히 존중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일은 아닌지 짚어 볼 일이다.

가족 간의 상처는 그 누구에게서 받는 상처보다 깊고 클 수 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이기 때문이다. 가족 간의 갈등을 그린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쓴 미국 작가 유진 오닐은 자전적인 이 작품에 대해 “피와 눈물로 썼다”고 했다. 그만큼 가족 간의 갈등은 아픈 것이다.

법리에 의해 시비는 가려질 것이다. 그러나 그 뒤의 갈등이 치유되기까지는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피눈물 나는 각성과 소통이 필요해 보인다. 대한민국 스포츠를 빛냈던 순간에 함께했던 두 사람의 영광이 아픔으로 마무리되려는 것을 보는 것은 안타깝다. 하지만 가족 간의 아픔이 아무리 쓰라려도, 거기에는 늘 극복을 위한 희망도 있다고 본다. 그 깊은 곳에는 여전히 가장 가까웠던 존재에 대한 사랑이 살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끝났다고 여겼을 때도 역전은 이루어지듯, 두 사람 사이도 언젠가는 오늘의 이 갈등을 넘어 치유의 모습으로 마무리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아픔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영광과 갈등을 넘어선 치유의 눈물이 흐를 수 있기를.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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