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외교전에서 이기고 싶어? 속내를 감춰라

이남석 발행인 2024. 6. 2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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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71
순신의 예측대로 기습에 나선 왜군
병이 깊다는 핑계로 도망친 배설
왜군 유인하려 미끼 던진 이순신
소 5마리 싣고 순신 찾아온 점세
수륙병진으로 조선 함대 노린 왜

자고로 적 앞에 선 지도자는 단선적이면 안 된다.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 속내를 숨긴 채 '모든 수'를 검토해야 한다. 판옥선 12척만 갖고 있던 이순신이 왜적 앞에서 당당하게 결전을 준비할 수 있었던 배경도 '단선적인 전략'을 쓰지 않아서였다. 그는 진영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왜적을 흔들어놨다. 외교의 성패는 전략에 의해 갈린다. 속내가 뻔히 보이면 외교전에서 승리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지금 어떤 전략을 펴고 있을까.

전쟁을 방불케하는 외교에선 피아를 따져선 안 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판옥선 12척을 확보한 이순신은 일단 함선들을 어란진 바다 위에 머물게 했다. 이진까지 진출한 적의 공격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함대로 복귀한 경상우수사 배설은 벌벌 떨고 있었다.

1597년 8월 28일 새벽 6시쯤, 이순신의 예측대로 왜선 8척이 기습공격에 나섰다. 함대의 장졸들은 칠천량 해전의 기억 때문인지 모두 겁을 먹고 있었다. 이순신이 배설을 바라다보니 그는 오직 후퇴할 생각만 하고 있는 듯했다. 왜선들이 바짝 다가오자 이순신은 호각을 불고 깃발을 흔들며 배설 이하 제장에게 적선을 따라붙도록 명령했다. 조선 함대가 돌진하자 적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재빨리 달아났다.

이순신 함대는 적들을 갈두(땅끝마을)까지 추격하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에 진영을 장도獐島로 옮겼다가 29일 진도군 벽파진으로 이동해 진을 쳤다. 그 이튿날 배설은 적이 몰려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순신에게 병이 깊다는 핑계를 대고 전라우수영을 거쳐 육지로 올라갔다.

이순신은 벽파진으로 진을 옮긴 후 병력과 화기, 군량미 등을 보충하면서 적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화포와 격군을 갖추지 못했던 판옥선 1척도 전투에 나설 채비를 갖추면서 조선의 함선은 13척으로 늘어났다. 왜적 수군도 어란포를 전진기지로 삼아 수백척의 함선이 집결하는 등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양측의 치열한 수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순신이 그동안 어란포에서 장도로, 장도에서 다시 벽파진으로 진을 옮긴 것은 적을 명량으로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다. 왜적은 조선 수군의 동태를 파악하느라 벽파진 뒤에 웅크리고 있는 명량 해협의 지형과 물때를 파악할 틈이 없었다. 이순신의 우려했던 한 가지 경우의 수는 왜선들이 벽파진이 아닌 진도의 바깥쪽으로 돌아가 맹골수도를 거쳐 서해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왜적 수군 수뇌부도 전략회의를 열었다. "조선인들의 사기가 떨어진 것을 기회 삼아 이번에 무조건 이순신의 목을 따야 한다. 지난번 칠천량 전투처럼 기습 선제공격으로 승기를 잡는다. 비록 13척이지만, 그자를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 적의 전투력을 알아보는 게 먼저다. 찔러보기로 13척을 내보내되, 공격과 후퇴하기를 반복하면서 지치게 만들어라. 그 이후 대규모 함대가 일제히 나서 적을 쳐부순다. 이상 끝." 대략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왜적을 '명량'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전략을 펼쳤다. [사진-뉴시스] 

벽파진과 어란진의 바다에는 늦가을과 초겨울 날씨가 혼재했다. 북풍이 심할 때에는 정박해놓았던 함선들을 고정하기조차 힘들었다. 이순신 함대도, 왜적 함대도 꼼짝할 수 없었다.

그래도 벽파진에서는 이순신을 응원하는 뜨거운 바람도 있었다. 9월 2일 점세라는 인물이 제주도에서 소 5마리를 싣고 와서 바쳤다. 하지만 차갑고 비겁한 백성도 있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탈영해 도망간 것이다. 배설은 이순신이 제아무리 귀신같은 전략을 펼쳐도 13척의 판옥선으로 대규모의 적과 싸워 이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9월 7일이 되자 추위와 바람이 멎고 날씨도 맑아졌다. 이순신은 군관 임중형에게 적진을 탐망해올 것을 지시했다.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수군을 목표로 두고 있는 듯 보입니다." 임중형의 보고에 이순신은 엄중한 경계령을 내렸다. 오후 4시가 되자 왜선 13척이 벽파진으로 돌진했다. 조선 수군이 즉각 공격에 나서자 적 함선들은 뱃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뒤쫓아 갔지만, 바람과 물결이 거세지고 있는 데다 적의 매복도 우려돼 더 이상 쫓지는 않았다.

벽파진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밤에 장수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오늘 밤에는 반드시 적의 기습이 있을 것이니, 제장들은 철저하게 대비하시오. 만약 조금이라도 어긴다면 군법대로 처리할 것이오"라며 더욱 긴장할 것을 주문했다. 예측한 대로 밤 10시께 적 함선들이 포와 조총을 쏘며 기습공격에 나섰다. 그러자 첫 해상전투에 참여한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 장졸들이 모두 겁을 냈다. 이순신은 "만일에 회피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시행할 것이다"며 엄명을 또다시 내리고 선봉을 자처했다.

이순신은 "지자포를 쏘는 소리에 바다와 산이 진동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조선 수군의 위력에 놀란 적의 무리들이 후퇴를 했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다시 또 공격해왔다. 대포만 쏘아대며 공격하다가 물러서기를 네번이나 반복했다. 이순신 함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다. 조선 함대를 지치게 하려는 적의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지쳐 나가떨어진 건 오히려 왜적 함선들이었다. 결국 큰 피해를 입고 새벽 1시쯤 모두 도망쳤다.

전투과정에서 이순신은 김억추의 태도를 눈여겨보았다. 얼마나 실망했는지 다음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않아서 수사로 쓰일 재목은 아니다. 하지만 좌의정 김응남의 신임을 받고 있어 억지로 임명해 보냈다. 이래서 어디 조정에 쓸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할 뿐이다."

명량 해전의 전초전이었던 벽파진 전투가 벌어진 9월 7일, 육지에서는 충남 직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앞서 전주에 무혈 입성한 11만명의 왜적은 무차별적인 약탈과 코 베기 살육을 일삼다가 두 갈래 방향으로 갈라졌다. 황석산성을 넘어 전주에 합류했던 왜적 우군은 천안과 청주 쪽으로 갈라져 북진했다. 좌군은 다시 남하하면서 전라좌도와 전라우도에 각각 왜성을 쌓고, 군량미를 확보하면서 수륙병진으로 이순신 함대를 전멸시키고자 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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