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의 F, 광장의 T [뉴노멀-혁신]
김진화 | 연쇄창업가
2006년 세계문학상을 받은 박현욱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는 폴리아모리(다자간 연애)를 추구하며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뤄가는 과정을 유쾌하게 다룬 문제작이다. 작가 스스로 ‘판타지’라 칭할 정도로 파격적이었지만 사회학과 여성학 내에서만 논의되던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결합’과 가족제도의 탈근대적 흐름을 대중적으로 환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근 20년이 흐른 지금 이 작품을 떠올리게 된 건 알다시피 ‘세기의 이혼’이라 불리는 어느 재벌가의 소송전 때문이다.
1조3천억원대에 이르는 재산분할액은 말 그대로 천문학적이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과 재벌의 혼인을 매개로 한 유착 관계는 술자리에서나 오갈 풍문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라 충격적이었다. 재산분할 금액을 낮추기 위해 자신이 회사 발전과 성장에 기여한 게 거의 없음을 역설하는 재벌 총수 쪽의 변론은 블랙코미디 같았다. 세간의 예상을 뒤엎은 이번 판결의 화룡점정은, 재벌 총수가 “헌법이 보호하고 있는 혼인의 순결과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는 재판부의 통렬한 질타였다.
여론 추이를 보면 꽤 많은 이들이 속 시원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혼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재벌 총수 쪽이 취했던 태도가 다소 성급하고 거칠었으며, 이것이 이른바 ‘대중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적으로 성숙해온 새로운 결혼 제도와 가족 형태에 대한 논의와 인식이 후퇴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버림받은 대통령의 딸과 자식들’ ‘처가와 가족의 지원을 배신한 재벌 회장’이라는 흑백 구도는 인류가 함께 봉착해 있는 결혼·가족 제도의 한계를 살피는 여러 의미 있는 시도와 논의들까지 ‘혼인의 순결’을 명시한 판결문 앞에 무장해제시킬 태세다.
최근 논란과 화제가 되는 다른 이슈들에서도 흑백의 서사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논점들을 형해화하는 식의 양상이 뚜렷하다. 이른바 ‘민희진의 난’이라 불리는 하이브와 걸그룹 뉴진스 소속사 어도어의 분쟁을 보자. 기존에 재벌이 하던 대로 자기 사람을 잔뜩 심는 방식으로 자회사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율성을 부여하면서도 상호 간에 신뢰를 지키는 게 이득이 되는 주주 간 계약 방식은 없을까. 계약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까지 신뢰와 결속을 담보해주는 지배 구조는 어떤 게 있을까 등의 생산적 논의는 ‘군림하는 개저씨들’ ‘핍박받는 뉴진스 대모’ 구도 속에 설 자리를 잃는다. 네이버 라인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판에 박힌 한-일 간 대립 문제로 환원시키는 와중에 모회사인 네이버와 주주들의 이해가 오히려 위태로워진 측면이 크다. 극단적 편가르기로 정파의 이익을 극대화하며 그 대가로 공론장을 황폐화하는 정치권의 얕은 수법이 사회 모든 영역으로 확대재생산되는 건 아닌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혈액형에 이어 대세가 된 엠비티아이(MBTI) 유형검사에서 이성적인 티(T) 유형은 감성적인 에프(F) 대비 여러모로 소수자다. 바야흐로 공감의 시대 아닌가. 아픔과 고단함을 털어놓는 상대에게 충분한 위로와 공감 대신 아픔의 원인을 따지고, 고단함을 벗어나는 방법이며 그 일에서 얻을 교훈 따위를 늘어놓는 티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다만 공감대를 무기로 복잡다단하기 마련인 세상사의 여러 모순과 갈등을 흑백으로 단순화해 편가르기에 나서는 흐름 앞에서 우리 모두 대문자 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가족, 동료, 식당 종업원과 경비원에겐 냉정한데, 눈물 흘리는 정치인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열광까지 마다하지 않는 사회는 끔찍하다.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관계에서는 따뜻한 이해와 공감을 앞세우는 에프가 되고, 사회적 논의와 공적인 관계에서는 기꺼이 티가 되는 걸 두려워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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