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K재벌가 이야기로 재탄생한 고전연극 《벚꽃동산》
(시사저널=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고전 희곡의 위대한 극작가가 셰익스피어라면,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대문호 안톤 체홉은 현대 희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4대 장막극인 《세 자매》 《벚꽃동산》 《바냐 아저씨》 《갈매기》는 우리나라에서도 단골로 공연되는 레퍼토리다. 이 중 《벚꽃동산》(1904년 초연)이 오랜만에 정통 연극 무대로 관객을 불러 모으며 큰 화제에 오르고 있다.
이 작품은 무겁고 비극적이지만, 줄거리나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보면 다분히 희극적이다. 19세기 러시아의 몰락한 귀족 집안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라네프스카야' 부인은 심각한 재정난으로 빚더미에 앉으면서 자신의 고향집이 있는 벚꽃동산이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라네프스카야는 악단을 불러 파티를 열거나, 거지에게 금화를 적선하는 등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인물이다. 5년 동안 집을 떠나 있던 라네프스카야 부인과 오빠 '가예프'가 벚꽃동산, 고향집으로 돌아오지만 기다리는 것은 빈털터리 현실뿐이다. 그럼에도 두 남매는 옛날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시절의 추억만을 되새기며 허세를 놓지 않는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흡의 희곡
경매에 넘어가게 된 벚꽃동산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그 집안 농노의 자식이었던 '로파힌'이다. 상인으로 성공해 부를 축적한 그는 라네프스카야에게 "집과 벚꽃동산을 별장으로 재개발하자"고 말한다. 새로운 임대사업을 해서 빚을 갚고 지속적인 수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과거의 하층민이었지만, 이제는 미래를 향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신흥 부르주아 로파힌과 봉건시대 쇠락한 귀족이지만 여전히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라네프스카야, 두 인물 사이에는 세상을 보는 관점의 극명한 대비가 있다. 벚꽃동산은 '제정 러시아 말기'를 상징하는 메타포이기에 그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재화를 움켜쥔 신흥계급은 귀족들이 애착하는 벚꽃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새로운 자본을 설치해 더 큰 부를 꿈꾸었다. 하지만 극 중 로파힌이 부와 권력을 잡은 지 불과 수십 년 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국가로 거듭났다가 1991년 개혁·개방 정책으로 소련이 해체됐다. 역사는 계속 흘러가기에 만약 체홉이 살아있었다면 《벚꽃동산-번외편》을 집필해야만 했을지 모른다.
현재 서울 마곡동 엘지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벚꽃동산》은 배우 전도연의 27년 만의 연극 복귀작으로 알려지면서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다. 여기에 호주 출신으로 영화 《더 도터》(2015), 《더 디그》(2021)의 감독이자 연극 《메디아》 《예르마》 《입센 하우스》 등을 통해 고전을 재해석하는 데 탁월한 능력으로 동시대 가장 독창적인 연출가 그룹에 속해 있는 사이먼 스톤이 원작을 현대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직접 각색했다.
이러한 재해석과 새로운 시도는 관객과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며 흥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원작의 라네프스카야 부인은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고 미국으로 떠났다가 시간이 흐른 후 서울로 돌아온 '재벌 3세' 송도영(전도연)으로 바뀌었다.
오빠 송재영(손상규)의 무능한 경영으로 인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회사와 집이 파산할 위기에 처했음에도 여전히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딸이자 어머니다.
이 남매는 보통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방식을 가졌다. 도영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신이 열여섯 번째 생일날 아버지에게 선물받은 집을 날릴 위기에 처했어도 정작 돈에 관한 대화는 회피하려 한다. 오히려 세월을 비껴간 아름다운 외모로 음주를 즐기며 딸의 남자친구한테 키스하고, 순간적인 감정에 빠졌다며 변명하는 현실도피형 인물이다.
재영은 경영인으로서는 빵점에 가까운 무능 그 자체지만, 음악을 사랑해 창고에서 꺼낸 오래된 LP레코드에 말을 거는 등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몽상가에 가깝다.
원작에서 신흥 부르주아 계급으로 신세대를 상징하는 로파힌은 이번 작품에서는 남매의 집안 운전기사의 아들로 자수성가한 기업가 황두식(박해수)이다. 그는 몰락해 가는 남매의 기업과 벚꽃동산 저택을 보존할 방법을 사업가의 관점에서 제안해 보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결국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아름다운 벚꽃동산이 있는 저택은 재개발로 무너지며 재벌 가문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작품을 맡은 전도연 배우는 1992년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2》에서 연기자로 데뷔했고, 1997년 영화 《접속》으로 명실상부한 '천의 얼굴을 가진' 대한민국 최고 영화배우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같은 해 연극 《리타 길들이기》에도 출연했지만 이후 27년 동안 연극에 출연하지 않았는데, 이 작품으로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삼각 피라미드 모양의 무대 건축 '눈길'
이 작품에서 송도영의 특별한 캐릭터도 전도연이기에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요즘 대극장 연극 무대에서 마이크 사용이 일반화됐기에, 매체 연기에서 보여준 풍부한 감정 연기와 정확한 대사 전달력이 무대에서도 잘 구현됐다.
배우 전도연을 잘 받쳐주는 박해수 배우의 열연도 특별하다. 원작과 비교해 어릴 때부터 도영을 동경해 왔지만 표현할 수 없었고, 세월이 흘러 이제는 능력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숨기지 않는 변화무쌍한 인물로 재탄생했다. 극 중 가장 이성적인 캐릭터에 가깝지만 출신 신분의 차이로 인해 내면적인 벽에 갇힌 안타까운 모습도 잘 표현했다.
건축가 출신으로 무대 디자인을 맡은 사울 킴은 바닥부터 지붕까지 계단으로 이어진 거대한 삼각형 피라미드 모양의 벚꽃동산 대저택을 만들었다. 10명의 등장인물은 1층 거실과 2층 침실은 물론 저택의 외벽을 따라 꼭대기까지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면서 계급과 이념의 충돌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꼭대기에 오르면 발밑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 시야는 좋아지지만, 발을 좁게 디디고 있어야 해 불안정하다.
이러한 거대한 삼각형 저택의 내외부에서 많은 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 각색, 연기, 디자인 등 여러모로 이 작품은 그동안 한국에서 공연된 《벚꽃동산》 중에서도 최고의 재미와 완성도를 갖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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