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과 진영의 영광, 그 밑에 깔린 소음 [전쟁과 문학]
쇼스타코비치와 「시대의 소음」
레닌그라드 포위전 견뎌낸 시민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초연
나치에 대항하는 이들에게 큰 용기
그럼에도 “전쟁 기간 더 안전했다”
스탈린 체제 억압으로 더 큰 고통
세계적인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년)는 전쟁보다 스탈린 체제의 억압으로 더 큰 고통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는 1949년 '당신은 스탈린 체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제 생각을 말할 수 없었다. 훗날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인간은 젊은 시절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모습으로 늙는다." 그가 음악 속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당과 진영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1941년 9월부터 소련의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한 독일군은 시가전을 피해 도시를 고사枯死시키는 전술을 구사했다. 봉쇄된 도시에는 식량이 떨어졌고 독일군의 포격은 밤낮으로 이어졌다. 독일군의 봉쇄는 1944년까지 계속됐다. 레닌그라드의 시민들은 400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면서도 끝내 포위를 견뎌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8월 9일 밤 수만명의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필하모니 홀에 모여들었다. 그곳에서는 세계적인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년)의 '교향곡 7번'이 초연되고 있었다. 소련군은 대형 스피커를 설치해 도시를 포위한 독일군에게도 음악이 들리도록 했다. 이 기묘한 연주회는 레닌그라드의 항전 의지를 대변하는 강렬한 풍경으로 각인됐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과 레닌그라드 연주회 소식은 영국과 미국에도 알려졌고 나치와 싸우는 연합국 국민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애국심을 음악으로 표현한 국민 영웅이었지만 그는 훗날 육성 회고록 「증언」에서 자신이 "전쟁 기간에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고 술회했다. 쇼스타코비치가 전쟁보다 스탈린 체제의 억압으로 더 큰 고통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인 쇼스타코비치는 1919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젊은 작곡가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제정帝政 러시아가 무너졌으나 청년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을 위한 혁명'에 수긍했다. 그는 서민들의 애환을 음악에 담고자 노력했고, 혁명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장송곡을 만들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집권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스탈린은 의심 많은 독재자였다. 모든 독재자가 그러하듯이 스탈린도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예술 텍스트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음악, 미술, 영화ㆍ연극, 문학 등 예술 텍스트를 집요하게 감시했고, 마치 공장에서 생산량을 할당하는 것처럼 예술 작업을 지시했다. 조금이라도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예술가들은 '형식주의자'로 몰았다.
쇼스타코비치가 작업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상연하자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문예면에 신랄한 비평문을 게재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재즈'와 비슷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연상하게 한다는 것이 비판의 근거였다.
당시 미국으로 망명한 음악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흑인 재즈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숱한 명곡을 발표하자 스탈린 체제는 재즈 음악을 경계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작품이 난도질당하는 현실에 분개했으나 '프라우다'에 맞서는 것은 자살 행위에 불과했다.
고민하던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음악을 아끼는 투하쳅스키 원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투하쳅스키는 반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숙청됐고, 쇼스타코비치도 심문을 받았다.
투하쳅스키가 어떤 정치인과 연루됐느냐는 질문에 쇼스타코비치가 "정말 모른다"고 답하자 심문관 자크렙스키는 "무조건 기억해야 한다"고 못 박는다. 없는 기억을 자백하라는 황당한 강요였지만 불복하는 자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자크렙스키의 심문을 받은 날부터 몇 달간 쇼스타코비치에겐 밤마다 가방을 들고 아파트 계단에 앉아 자신을 체포하러 오는 비밀경찰을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다. 끌려가는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다. 이 장면은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쓴 줄리언 반스의 소설 「시대의 소음(2017년)」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자포자기한 쇼스타코비치는 처벌을 요청하려고 스스로 내무부를 찾아갔다.
그런데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그 며칠 사이에 심문관 자크렙스키도 숙청된 것이다. 이 겹겹의 감시체제에 걸려 투하쳅스키를 비롯해 부하린, 마야코프스키 등 수많은 지식인, 장교, 예술가들이 죽임을 당했다.
몇 년 후 독일과 전쟁이 시작되자 쇼스타코비치는 애국심을 담은 곡과 죽은 자를 애도하는 협주곡을 만들었다. "인민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궁지에 몰린 조국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음악에 새기고 싶었다"는 뜻을 반영한 작업이었다.
종전 후 모스크바음악원 교수로 임명된 후에도 당의 기계적인 검열은 계속됐다. 당시 문화부 장관 즈다노프는 예술의 가이드라인을 설정('즈다노프 선언')했다. 이 선언은 모든 예술 작품은 정부가 제시한 주제만을 다뤄야 한다는 일종의 경고문이었다.
1949년 4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 평화를 위한 문화와 과학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가한 쇼스타코비치에게 미국 언론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미국에는 니콜라스 나보코프, 스트라빈스키 등 망명한 러시아 음악가들이 있었다.
미국 기자들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집중적으로 질문을 퍼부었다. 질문의 핵심은 간단했다. '당신은 스탈린 체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자들이 '즈다노프 선언'과 '프라우다'의 비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쇼스타코비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프라우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하면서 망명한 스트라빈스키를 "자본주의의 하수인"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 원고는 쇼스타코비치가 쓴 것이 아니었다. 쇼스타코비치가 미국에서 겪을 상황을 예측한 소련 정부는 이미 예상 질문과 답변을 마련했고, 쇼스타코비치는 그 답변을 암기해야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인간은 젊은 시절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모습으로 늙는다." 그가 음악 속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당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슬픔'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시대의 소음'을 이기고 살아남은 원동력이었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