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하이재킹, 막다른 길 마주한 파일럿의 선택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2024. 6. 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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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납치’ 실화 소재로 한 영화 《하이재킹》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노트북 꺼내고, 외투를 주섬주섬 벗는다. 페트병 물은 남김없이 마셔버리고… 아차차, 귀금속 빼는 걸 잊을 뻔했네! 비행기를 타려면 통과의례처럼 거쳐야 하는 공항 보안검색대. 지금의 까다로운 보안검색은 무수한 '하이재킹(hijacking·항공기 공중납치)' 역사의 결과물이다. 비행기 납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각국 정부와 항공사들은 보안 검색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수화물 컨베이어 벨트는 나날이 최첨단으로 업그레이드돼 지금에 이르렀다. 영화 《하이재킹》은 이러한 보안검색대 검사가 허술했던 시대에 일어난 국내 비행기 납치 사건을 그린다. 심지어 실화다. 우리 역사에는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3차례의 하이재킹이 있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 공중납치 사건은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대한국민항공사(KNA) 소속 민항기인 창랑호가 예정된 항로를 이탈해 평양 순안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남파공작원에 의해 이뤄진 납치극이었다. 1969년 12월엔 51명을 태우고 강릉에서 이륙한 KAL(YS-11)기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원산비행장에 불시착했다. 북한은 조종사들의 자진 입북이라고 주장했다. 남한은 고정간첩에 의한 납치라고 대응했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북한은 이름해 2월 승객 39명을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다. 그러나 승무원들과 승객 7명의 송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주) 제공

비행기 안에 스며든 시대적 공기

휴전선 하늘길이 흥분을 채 가라앉히기도 전인 1971년. 속초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F27기 안에서 다시 한번 하이재킹이 일어났다. 범인은 스물세 살의 김상태. 사제폭탄을 든 김상태가 외쳤다. "나는 죽을 각오가 돼있다. 기수를 북으로 돌려!" 그러나 비행기는 김상태의 뜻과는 달리, 강원도 고성 바닷가에 비상착륙했다.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기지를 발휘한 결과였다. 무엇보다 승객을 지키기 위해 폭발하는 사제폭탄을 끌어안은 부기장의 선택 덕분이었다.

《1987》의 김경찬 작가가 각본을 맡고, 《아수라》 《1987》 《백두산》 조감독을 거친 김성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하이재킹》은 이 중 1969년과 1971년의 사건을 엮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1969년 납치 사건을 도입부에 배치한 후, 1971년 F27기의 혼돈 한복판으로 관객을 태운다. 두 사건의 이음새 역할을 한 건, 하정우가 연기한 파일럿 태인이다.

1969년 공군 전투기 파일럿 태인은 남파 간첩에 납치된 민항기를 뒤쫓는 중이다. 민항기가 휴전선을 넘기 전에 엔진에 사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전역한 사수(최광일)가 해당 민항기의 기장임을 확인한 태인은 승무원과 승객의 안전을 우려해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 일로 전역당한다. 얼마 후 북으로 납치된 승객 일부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다. 하지만 태인의 사수는 돌아오지 못하고, 돌아온 이들에게도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 일은 태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자국을 남긴다. '내가 그때 사격했더라면, 승객들은 빨갱이 소리 듣지 않고 살아갔을까.' '그랬다면 모두의 생명이 위험하지 않았을까?' 잘못한 선택이라는 '죄의식'과, 그게 최선이었다는 '자기 위안' 사이에서 그는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자신을 몰아세우며 불면의 밤을 지새웠을까. 그러나 삶에는 정답이란 건 없고, 선택이 남긴 결과만이 남을 뿐이다. 그것이 후회이든 절망이든 그 무엇이든, 인간은 그렇게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후 민항기 부기장이 된 태인에겐 자신의 과거 선택과 다시 마주할 기회가 온다. 김포로 향하던 비행기가 납치되면서, 비행기 조종석에 앉은 태인은 과거 사수와 '역지사지' 상황에 놓인다. 북으로 가라고 협박하는 용대(여진구), 용대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기장 규식(성동일), 공포로 질린 승객들 사이에서 태인은 어떤 선택을 할까. 《하이재킹》은 삶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사람의 선택을 그린다.

'하이재킹'이라는 소재 자체는 사실, 신선함이 거의 없다. 이 영화에 새로운 날개를 달아주는 건 시대상이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시대 공기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항공기 보안이 허술했고 비행기가 아직 범대중적인 교통수단이 아니던 복고적인 1970년대 정취를 이야기함이다. 영화는 이를 '응답하라 1971' 식으로 활용했다. 비행기 좌석이 지정석이 아니었기에 펼쳐진 '오픈런' 행렬 등이 배합돼 웃음을 안긴다. '비행기 탈 땐 신발 벗으세요'라는 우스개 농담 역시 에피소드로 쓰였다.

영화 《하이재킹》의 한장면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주) 제공

아쉬운 빌런 캐릭터 조형술

비행기 안에서 흡연하는 승객에게 스튜어디스가 다가간 이유가 흡연을 제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를 재떨이에 잘 털어 달라는 읍소를 위해서라는 건 반전 아닌 반전. 비행기에서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니. 40년 동안 우리의 사고 체계는 얼마나 변한 것인가. 무엇보다 이러한 시대상은, 범인이 사제폭탄을 손쉽게 숨기고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만약 시대 배경이 2024년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설정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이재킹》에도 결함은 있다. 이 구멍의 상당 부분은 빌런 캐릭터 조형술에서 나온다. 빌런인 용대에게 부여된 전사(前史: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된 형 때문에 차별받은 울분)가 일단 너무 교과서적이다. 신파적이라기보다, 전형성이 지나치게 강한 느낌이랄까. 용대의 실제 모델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남아있지 않은 만큼,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여진구는 좋은 배우다. 그가 《화이》에서 보여준 날카로운 면모를 떠올렸을 때, 빌런 캐릭터를 소화할 재능이 충분하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캐릭터의 전형성으로 인해 새로운 도전이 충분히 날개를 펼치지 못한 인상이다.

하지만 대중영화로서의 《하이재킹》은 관객이 재난 영화에서 보고 싶어 하는 액션은 물론 유머까지도 놓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 사건을 다뤘다고 해서 지나치게 무겁지도, 여름 오락물이라고 해서 한없이 가볍지도 않다. 선택과 집중 역시 좋은 편이다. 항공기가 납치된 상황에서 정부가 어떤 제스처를 취했는가에 대한 그림은 과감하게 생략되고, 공군 전투기 조종사에 의해 정부 입장이 간략하게 브리핑될 뿐인데, 이러한 선택이 영화가 중구난방으로 펼쳐지는 걸 막아내는 데 일조한다.

홍어 팔러 외국에 나간 사람이 마약왕을 잡기 위해 위장 브로커가 된다는 믿기 힘든 실화 《수리남》, 베이루트에서 무장 괴한에게 21개월간 피랍됐다가 풀려난 레바논 주재 한국대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비공식작전》 등, 근래의 하정우 행보를 보면 역사에 숨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들에 끌리는 시기인 것 같다. 그 연장선에서 다시 한번 실재했던 역사 속으로 들어간 하정우는 위험천만하고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캐릭터의 퍼스낼리티를 생생하게 표현해 낸다. 직업인으로서의 자세와 선택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조율하며 영화가 불시착하는 걸 막아낸다. 그러니까, 하정우는 《하이재킹》이라는 프로젝트의 나침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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