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하는 아버지 죽어 마음 편해져”...살인자 아들, 심신미약이라고? [법조인싸]

강민우 기자(binu@mk.co.kr) 2024. 6. 2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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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돕기 위해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이미지=ChatGPT>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않고 이와 같은 능력이 미약한 자는 형을 감경한다
2023년 5월 29일 서울 중랑구의 한 아파트. 밤 12시경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던 70대 남성 A씨는 목과 뒤통수 부위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그를 공격한 사람의 정체는 양손에 부엌칼을 든 그의 아들 30대 김모씨였다. A씨는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건장한 청년의 완력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김씨는 계속 A씨의 얼굴과 머리를 찔렀다. A씨는 우측 경동맥 절단에 의한 과다출혈로 결국 그 자리에서 숨졌다.

김씨는 곧바로 범행 은폐를 위해 아파트 물탱크가 있는 지하 2층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시체를 은닉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옷으로 덮은 시체를 물탱크로 밀어 넣었다. 시체를 옮기는 과정에서 미리 준비해둔 청테이프를 이용해 1층 현관과 엘리베이터의 CCTV를 가리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발각을 피하기 위해 범행 장소인 화장실은 물을 뿌려 청소했다.

범행은 아주 잔혹했지만 그 동기는 비교적 사소했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김씨는 평소 부친의 잔소리로 괴로워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 스트레스는 부친을 죽여야 마음이 편해진다는 생각으로 그를 이끌었다고 한다. 검찰은 김씨에게 존속살해와 시체은닉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자폐스펙트럼 장애 ‘심신미약’ 주장... “범행 치밀하게 계획”
법정에 선 김씨는 심신미약을 주장했다. “자폐스펙트럼 장애로 인해 범행 당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실제로 김씨는 6살 무렵이던 1999년 자폐 3급 진단을 받고 장애인 등록을 했다. 김씨의 정신감정을 맡은 정신과 전문의도 “김씨의 상태는 자폐스펙트럼 장애와 지적 불균형으로 변별력과 의사결정 능력이 손상된 심신미약 수준”이란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심신미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김씨가 범행 과정에서 보여준 계획적인 모습에 주목했다. 심신미약을 받아들이기엔 김씨가 매우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김씨가 모친이 여행을 가서 집에 없을 때를 노려 범행 도구인 청테이프 등을 사고 시체은닉 장소를 물색한 점, 청테이프로 CCTV를 가리고 범행 이후 물청소를 하는 면밀함을 보인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또 1심 재판부는 김 씨가 장애 판정 이후 약물 치료를 받은 횟수가 한 차례에 불과한 점과 고등학교 졸업 후 의류매장 등에서 장기간 일한 과거를 언급하며 “직장 동료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등 비교적 안정된 사회생활과 일상생활을 해왔던 것을 보인다”고 했다. 수사 과정에서 보인 태도도 판단의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범행을 부인하고 유리한 변명을 하거나, 질문을 이해하고 적절한 답변을 하며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의사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1심은 지난해 12월 김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자폐성 장애를 앓고 있다”면서도 이 점을 감형 사유로 삼지는 않았다. 오히려 ‘계획적 살인’ ‘잔혹한 범행수법’ ‘존속인 피해자’ 등을 가중요소로 고려해 선고형을 결정했다.

“판단력 부족·사회성 결여”... 심신미약 인정해 15년으로 감형
양측은 “형량이 부당하다”며 항소했다. 검찰은 “형량이 너무 가볍다”고, 김씨는 “징역 20년은 너무 무겁다”고 주장했다. 심신미약이 재판의 쟁점이 됐고 결국 김씨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울고법은 그에게 1심보다 5년 줄어든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심신미약의 근거를 하나씩 열거하며 논리를 전개해 나갔다. 항소심 재판부도 김씨가 성인이 된 후 자폐 증상이 일부 완화된 점 자체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 수준이 경미해 심신미약이 아니라고 단정한 1심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청소, 포장, 물건정리 등 김씨의 업무는 어디까지나 단순작업에 불과해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앓는 사람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것들이라 일반인과 비교는 무리라는 취지에서다.

김씨의 언행 등을 바라보는 관점도 1심과는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화내는 말투로 말을 걸어서 스트레스를 받아 아버지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등 김씨의 진술에서 드러난 범행 동기가 지나치게 경미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김씨의 의사결정이 “근시안적이고 즉흥적인 방법으로 이뤄졌다”는 지적이었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계속 웃음을 보이거나 ‘아버지가 스트레스 받게 했는데 죽어버려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죄송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라고 진술하는 등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 능력이 현저히 결여된 점도 1심에선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범행 정황도 1심과 다르게 해석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CCTV에 청테이프를 붙이는 장면이 촬영된다는 점까지는 고려하지 못하고 시신을 옮기면서도 은닉 장소까지 이어진 혈흔 대부분을 그대로 남겨뒀다”며 “식칼 슬리퍼 등을 비닐에 싸서 숨겨두면 경찰관들이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인식하는 등 단편적인 부분에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다양한 관점에서 상황을 인식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계획적 범행과 증거인멸 시도 등이 심신미약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 1심과 달리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심신미약을 인정할 만큼의 판단력 부족이나 사회성 결여가 충분히 드러난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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