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망령과 푸틴의 책략…냉혹한 국제정세와 흔들리는 한반도 안보지형
푸틴의 '새판 짜기'...스탈린과 닮은 꼴?
1950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스탈린의 머리는 무척 복잡했습니다. 베를린 봉쇄를 감행해 유럽에서 '철의 장막'을 치고 있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불과 5년 전만 해도 '동지'였던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 서방세계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죠. 미국은 봉쇄된 서베를린에 수송기를 동원해 물자를 공수하면서 더이상 스탈린이 서유럽으로 세력을 넓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고 성과도 거뒀습니다. 1949년에는 미국의 기치 아래 유럽을 군사적으로 한데 묶어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가 창설됐습니다. '냉전(Cold War)'이 본격화된 것이죠.
당시 소련으로선 서방세계의 강력한 의지와 실력행사에 힘이 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칸반도의 실력자가 된 유고연방의 티토도 소련의 도움 없이 정권을 장악한 터라 영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련이 티토의 힘을 약화 시키기 위해 유고연방 내 민족 간 갈등을 부추겨 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분석까지 나오던 터였습니다.
스탈린으로선 제국의 완성과 확대는 물론 사회주의 종주국 위상을 굳히기 위해 유럽에서 총력을 다해야 했습니다. 지금의 러시아나 2차대전 이후의 소련 역시 아시아보다는 유럽에서의 위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장기전이 된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의 힘을 분산 시켜라'
그런데 지금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과거 스탈린의 행적을 떠올리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단기전으로 끌날 줄 알았던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형국입니다. 전세가 러시아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는 하지만, 최근 미 의회의 우크라이나 지원안이 통과됐고 서방 세계도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으니까요. 제 아무리 러시아의 인구가 우크라이나에 비해 압도적이고 자원이 많다고 해도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힘이 부치는 건 러시아도 마찬가집니다. 푸틴과 가까운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오는 11월 대선에서 이길지 장담할 수도 없지만, 트럼프가 만약 승리해도 내년 취임 때까지 6개월 이상 남았으니까요.
그래서 푸틴이 NATO를 이끌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는 미국의 관심과 역량을 지구 반대편 동북아시아로 분산시키기 위한 전략적 행보에 나서지 않을까라는 전망이 있었던 것인데요. 이 불길한 전망은 결국 현실이 됐습니다. 조민 전 통일연구원 부원장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의 힘을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으로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사실상 핵 국가인 북한의 위협을 부추긴다면 미국의 동북아지역 전력 투사가 강화돼 우크라이나에서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바로 스탈린이 유럽에서 서방세계의 공세를 완화 시키고 미국의 관심과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북한의 남침을 승인한 것과 같다"고 분석했습니다.
스탈린은 김일성으로부터 남침계획 승인 요청을 무려 40여 차례나 받았다는 연구결과도 있을 만큼, 그는 자신의 결정이 불러올 결과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또 검토할 만큼 신중한 성격이었습니다.
이론이 있기는 하지만 6·25전쟁과 관련한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들을 살펴보면, 당시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을 승인한 것은 유럽에 집중되던 미국의 군사적 역량을 한반도로 분산시키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3년이 넘는 6·25전쟁 기간 이 땅에 파견된 미군이 연인원으로 계산할때 170 만 명 정도의 엄청난 병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미군의 힘을 분산시킨다는 스탈린의 '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푸틴, "소련군이 6.25전쟁 때 북한 위해 싸웠다"... 발언 의도는?
그럼에도 냉전 시대 소련과 냉전 붕괴 이후의 러시아에서는 그동안 6.25 전쟁에 대해 자신들이 '직접 군사를 보내 참전하지는 않았다', '지원 역할에 머물렀다'는 식으로 얘기해 왔습니다. 적어도 국제사회에서는 말이죠. 그런데 지난 20일 방북 당시, 푸틴은 공개적으로 "소련군이 1950년에서 53까지 북한을 위해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북한과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맺었습니다. 지난 1996년 폐기했던 '군사동맹 조약'에 준하는 성격의 조약을 말입니다. 아무리 '침략을 받으면'이라는 전제를 달아놨다 할지라도 사실상 '자동군사개입' 조항이 포함됐다고 봐야합니다.
"북·러 간 새 조약은 한·미 동맹에 버금가는 수준"
조민 전 부원장은 이번 북러 간 조약은 "한미동맹에 버금가는 수준"이라면서 "사소한 무력충돌도 '침략받았다'고 포장하고 선전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북한과 러시아 간의 군사동맹은 현실화됐다고 봐야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북한군 병력이 우크라이나 전선에도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습니다. 반대 급부로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군사 기술 지원이 본격화될 가능성도 커졌습니다.
대한민국으로선 냉전체제와 구 소련 붕괴 이후의 대러시아 외교가 혹독한 시험대에 오른 것입니다. 한반도 안보 상황 관리에 있어서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푸틴이 러시아로 돌아간 뒤 한미일 외교장관들이 회동을 통해 상황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대응책을 논의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은 왜 북·러 간 밀착을 경계할까
그런데 상황을 심각하게 보는 건 중국도 마찬가집니다.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적 밀착으로 한반도와 인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군과 동맹국들의 군사력이 더 투사된다면 중국으로선 결코 반가울리 없기 때문입니다. 푸틴은 한발 더 나아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베트남도 방문했습니다. 지금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해역분쟁에서도 갈등 관계지만 소비재와 경공업 분야에선 그야말로 치열한 경쟁자 관계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푸틴이 베트남을 방문해 친선과 우호를 강조하고 나서니 중국으로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자존과 실익'을 동시에 추구해온 베트남은 이번에도 주목할 만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중국을 대체할 '세계의 공장'을 꿈꾸는 베트남은 푸틴을 정중하게 환대하면서도 미국과 서방세계의 눈 밖에 나는 협약을 맺지 않았습니다. 베트남도 중국을 견제할 동조세력으로 러시아를 환영하되 그 환대가 지나쳐 국익을 훼손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 섬세하게 노력한 것이죠. 미국의 고위 외교당국자는 푸틴의 베트남 방문이 끝난 직후 하노이로 날아가 양국의 우호관계가 굳건하다고 밝혔습니다. 이념보다는 실질적인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고 강대국을 상대해온 베트남의 외교를 유심히 살펴볼 이유입니다.
한편 24년 만의 푸틴이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강력한 북·러 공조가 이뤄지는 것과 동시에 한국과 중국은 차관급 안보전략 대화를 했습니다. 그간 두 나라 사이 안보 전략대화의 격이 이보다 낮았던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입니다. 이 또한 불편했던 한중 관계를 돌이켜보면 예사롭지 않은 모습입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지금 그렇게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올해 4연임에 성공한 뒤 첫 외국 방문지로 중국을 선택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발 벗고 도운 북한을 먼저 가지 않겠냐고 봤지만, 첫 방문지는 중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입장에서 볼때 성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러시아로선 중국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시베리아 가스관 연결 게획 확정 등을 원했던 것 같지만, 시진핑 주석의 반응은 미지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미국과 유럽연합이 중국 전기차 등 주요 수출품목에 엄청난 관세폭탄을 예고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를 발 벗고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은 중국의 입지를 더욱 좁힐 수 있는 것이죠.
중국과 러시아간 '종주국' 둘러싼 해묵은 갈등 재현 조짐
여기에 더해 전문가들은 러시아와 중국 간 해묵은 '사회주의 종주국' 싸움도 이번 북러 밀착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스탈린의 소련도 유럽은 물론 전 세계 사회주의 국가들에겐 넘볼 수 없는 종주국이어야 했습니다. 그런 스탈린에게 중국 대륙의 새로운 주인이 된 마오쩌둥은 실력은 있지만 '자신의 위상을 넘지 못할 존재 '로 비춰졌을 법합니다. 아니 '반드시 아래 있어야할 존재' 가 되어야 했을 겁니다. 마오쩌둥이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가 모스크바 외곽에서 두 달간 '대기'해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은 냉전 시대의 중국이 아니죠. 스탈린이라면 중국을 방문하지도 않았겠지만 갔더라도 동북지방의 헤이룽장성까지는 가지는 않았겠죠. 푸틴은 갔습니다. 그러나 푸틴은 소련시대의 영광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가 이번에 북한을 방문해 선보인 전략은 중국에 대한 불편함도 담고 있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도 '탈중국'으로 나아가는 전략적 이해관계와 일치했다고 생각했을 법합니다.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냉철히 대응하며 전략적 '전략적 활로' 모색해야
우리가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한반도 안보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올바른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선 동북아시아를 넘어 반드시 확대경을 전 세계로 넓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지도와 거대한 체스판을 놓고 치열하게 전략을 구상하며 수 싸움을 하는 강대국들의 외교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힘의 각축장이었던 한반도는 언제든 다시 지각변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힘이 강해졌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없는 '정신승리'로 귀결될지 모를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번 사안을 모든 이해 당사국들의 다층적 시각에서 냉정하고 차분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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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철영 기자 (cykum@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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