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 문화 해친 ‘신선한 시신’ 논란 [편집인의 원픽]

2024. 6. 2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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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깔린 많은 종이들 가운데 하나를 탁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일. 흔히 언론의 역할로 불리는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의제 설정)이 그와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 중에 뉴스 소비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뭘까. 고민과 취재를 거쳐 우리가 내놓는 기사(어젠다)는 독자에 말을 거는 일이다. 뉴스 수명이 갈수록 빨라지는 요즘,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세계일보만의 기사를 소개한다.
헬스 트레이너 등을 상대로 카데바 해부학 강의를 홍보하는 문구. A사 홈페이지 캡처
“상부 승모근이 아니라 견갑골을 움직이세요.” 

필라테스 수업을 받다보면 자주 듣는 말이다. 이두, 삼두, 기립근, 내전근, 골반 기저근 등등 평소 제대로 활용하지않는 근육들의 이름과 친숙해져야한다. 필라테스 강사 자격을 취득하려면 신체 근육에 대한 지식은 기본일 것이다. 일정 기간 교육, 실습을 거쳐야한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실제 시신 해부 교육이 가능한 줄은 몰랐다. 세계일보가 단독 보도한 ‘기증받은 ‘카데바’를...가톨릭대, 민간업체에 돈 받고 해부 강의’ (6월11일자·백준무·이예림 기자) 기사는 의학 교육·연구에 사용돼야할 카데바(해부 실습용 시신)가 오용되고 있는 실태를 고발했다. 학교나 해당 강의를 진행한 업체는 불법이 아니라고 했지만 관련 규정을 어기는 등 논란이 잇따르고 있다. 

필라테스 강사한테 물어봤다. “실제 (시신을)해부하는 강의에 참석하기도 하나요?”  개인적으로 참석한 적은 없지만 “유료 강의가 있어서 돈 내면 가능하다”고 했다. 본지 보도처럼 필라테스 강사나 헬스 트레이너 등 비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카데바 해부 강의가 관련 업계에서는 관행처럼 이뤄져온 것이다. 경찰은 카데바 해부의 상업적 사용에 문제가 없는 지 수사중이고(6월12일자·경찰, ‘기증 시신 유료 강의’ 수사 착수) 보건복지부는 전국 의대 63곳에 실태 점검을 하고 관련 제도 개선을 추진키로 했다.(6월18일자·복지부 “영리 목적 시신 해부 교육 중단” 공문) 문제는 자발적 기증으로 이뤄져온 해부용 시신 수급이 이번 파문으로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제도적 허점을 메꾸는 조치가 시급한 이유다.   
시신 기증자들이 안장돼 있는 서울대교구 용인공원묘원 내 참사랑묘역 봉안당. 가톨릭중앙의료원 제공
◆“프레시(Fresh) 카데바로 진행됩니다!”

가톨릭대와 연계해 해부 강의를 진행한 한 민간 업체가 홈페이지에 올린 홍보 문구다. 당일 9시간 진행되는 강의 수강료는 60만원. 가톨릭대 의대 소속 김모 박사가 직접 시신을 해부하고 신청자들이 참관하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의학 교육용으로 활용돼야할 해부 강의에 일반인들이 참관하는 게 가능할까. 현행 시체 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시체해부법)은 이렇다. 시체 해부에 관해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의사 또는 해부학·병리학·법의학을 전공한 교수·부교수·조교수가 직접 시체를 해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학교나 관련 업체에서는 해부학 박사가 직접 해부를 진행한 만큼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지난해 진행된 같은 강의에 참여한 한 수강생이 “직접 카데바의 십자인대를 잘랐다”는 후기를 남겼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법 위반이 된다. 또한 강의를 진행한 박사가 법에 정한 ‘교수·부교수·조교수’에 해당되지않은 경우에도 위반 논란이 생긴다. 가톨릭대 뿐 아니라 다른 의대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경찰, 복지부가 위법 여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의학교육을 위해 시신을 기증한 분들을 추모하는 예배 장면.  의협신문 제공
◆시신 기증 문화에 악영향 우려 

“시신 기증은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선종 후 아무 조건 없이 해부 및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의과대학에 몸을 기증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의료인 양성과 의학 발전에 이바지하는 참사랑의 실천이자 궁극적으로 질병 없는 사회 구현에 기여해 생명의 빛이 되는 행위다.” (가톨릭 신문)

우리나라 의대에서 가장 많은 시신 기증을 받는 곳은 가톨릭대다. 과거 무연고자, 행려병자 시신에 의존했으나 관련법이 바뀌면서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계의 자발적인 시신 기증 운동이 해부용 시신 수급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전국 의대에서 요구되는 시신은 연간 1000∼1100구 수준으로 추산되는데 대학별로 수급 격차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 의대 증원이 확정되면서 교육 현장에 카데바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의료계에서는 이번 ‘영리 목적 시신 해부 교육’ 파문이 시신 기증 문화에 영향을 미치지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실제 관련 보도에는 “시신 기증의 숭고한 뜻을 돈벌이로 이용했다” 등 부정적인 댓글이 많았다. 복지부가 서둘러 유사한 교육 중단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고 위법 여부에 엄정 대응 방침을 밝힌 것도 이런 여파를 의식해서다. 복지부는 관련법 개정을 통해 영리 목적의 해부 참관 수업을 금지한다는 방침이다. 

P.S. 취재한 백준무 기자에 물었습니다.  
 
-카데바 유료 해부 강의 문제를 취재하게 된 계기는.
 
“처음 논란이 시작된 곳은 의사 커뮤니티였다. 의대에서도 카데바가 부족한 상황인데 비의료인을 대상으로 유료 해부 강의가 진행되자, 내부에서 먼저 문제 제기가 이뤄진 것이다. 소식을 듣고, 시신 기증의 원래 취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어 본격적인 취재에 착수했다. 취재 과정에서 보건 당국이 의대들의 이 같은 행태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대학이나 해당 업체에서는 불법이 아니라고 해명했는데 법적 허점이 있는 것 아닌가. 
 
“현행 시체해부법은 해부 주체에 대한 자격은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참관 자격에 대해서는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원론적으로는 일반인이 해부 강의에 참여하는 것도 가능한 셈이다. 의학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법의 취지와는 맞지 않다고 본다. 개별 의대가 자체적으로 카데바를 관리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통계가 없다는 점도 무분별한 해부 강의를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기증으로 유지되는 해부용 시신 수급에 악영향이 있지 않을까.  
 
“보건복지부의 용역 연구 중에도 부정적인 보도가 있을 때 시신 기증문화에 저해가 생긴다는 내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연구에선 시신 기증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로 응답자들이 ‘사후 관리에 대해 우려감’을 꼽았다는 결과도 있다. 이번 보도를 계기로 시신 기증과 활용 과정이 보다 투명하게 개선된다면, 장기적으로는 더욱 많은 이들이 시신 기증에 기꺼이 나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황정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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