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오케스트라로 클래식 ‘도장 깨기’…김선아·진솔 두 마에스트라의 도전

임석규 기자 2024. 6. 2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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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아, 고음악 분야에 독보적 존재감
진솔, 말러리안 프로젝트 이어 레퀴엠 시리즈
8일 간격 모차르트 ‘레퀴엠’ 지휘
8일 간격을 두고 모차르트 레퀴엠(진혼곡)을 지휘한 김선아(오른쪽)와 진솔. 한국종합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합창지휘자로 시작해 차음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임석규 기자

김선아(54)와 진솔(37), 두 마에스트라(여성 지휘자)의 도전과 실험이 눈길을 끈다. 각자 녹록지 않은 여건에서 민간 오케스트라를 창설해 분투해온 두 사람은 ‘도장 깨기’하듯 장벽을 허물어트리며 국내 클래식 음악계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

지난 17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카페에서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시간을 잊고 대화에 빠져들었다. 오래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난 사이다. 대화의 중심은 모차르트 레퀴엠(진혼곡)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8일 간격을 두고 이 곡을 지휘했다. 진솔은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6월12일), 김선아는 부천아트센터(20일)에서였다. 스승은 머리를 살짝 물들인 제자에게 “대견스럽다”고 했다. “이런 대규모 공연은 대관부터 쉽지 않아요. 펀딩까지 하면서 연주자들 모아 공연을 해낸다는 것 자체가 너무 대단한 일이죠.”(김선아) 레퀴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치유의 음악. 오케스트라는 물론, 독창 성악가(솔리스트)들과 합창단까지 가세해야 하는 대규모 곡이라 공연 자체가 쉽지 않다. 영화 ‘아마데우스’에도 나오는 레퀴엠은 모차르트가 서른다섯 나이로 요절할 때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유작이다.

부천시립합창단 상임 지휘자 김선아는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과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을 창단해 고음악 분야에서 독보적 입지를 다졌다. 프레스토컴퍼니 제공

어쩌면 두 마에스트라가 걸어온 음악 행로의 교차점에 이 곡이 있다. 부천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 김선아는 작곡 당시의 악기와 주법을 쓰는 시대악기 연주에서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 왔다. 바로크 합창단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2007년)과 시대악기 연주단체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2017년)을 그가 만들었다. 두 단체의 연주로 2018년 발매한 ‘모차르트 레퀴엠’ 음반은 국내 연주단체의 최초 녹음이다. 지난해엔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국내 최초로 시대악기로 연주해 서울예술상 음악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제자는 스승에게 존경을 표했다. “많은 귀감이 되어주셨어요. 젊은 연주자들도 존경하는 분이죠.”(진솔)

지휘자 진솔에게 이번 공연은 10년 프로젝트로 시작한 ‘레퀴엠 시리즈’의 출발점이다. 1년에 한 곡씩, 최소 10곡 이상 레퀴엠을 연주하는 여정이다. 베르디와 포레, 브람스(독일 레퀴엠), 브리튼(전쟁 레퀴엠), 리게티, 펜데레츠키, 류재준 등이 만든 레퀴엠을 차근차근 연주하겠다는 포부다. 이번 모차르트 레퀴엠 공연은 음반으로도 발매하는데, 김선아의 녹음에 이어 국내 두 번째다. 2016년 말러 교향곡 전곡 완주를 내걸고 시작한 ‘말러리안 프로젝트’도 이어가는 중이다. 지금껏 13∙5∙6∙9·10번을 연주했다. 스승은 힘과 추진력을 제자의 강점으로 꼽았다. “드라마틱한 연주였어요. 추진력 있게 끌고 가는 힘이 느껴지더군요.”(김선아)

두 사람은 공연장 대관부터 연주자 섭외, 기획과 홍보까지 종종거리며 뛰어다녀야 하는 민간 오케스트라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서로를 다독였다. 진솔은 “티켓 판매만으로는 대관료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비용 충당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에서 펀딩도 진행한다. “돈이나 월급으로 단원들을 움직일 수 없으니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죠.” 김선아 지휘자는 “악단을 통해 어떤 음악적 성취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게 관건”이라고 했다.

지휘자 진솔은 ‘말러리안 프로젝트’에 이어 ‘레퀴엠 시리즈’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플래직 제공

두 사람 모두 대학에서 합창 지휘를 전공한 뒤 다른 쪽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다만, 일하는 방식은 판이하다. 김선아는 계단 오르듯 바닥부터 단계적으로 접근한다. “도 닦는 사람처럼 북독일, 로마, 베네치아 등 여러 악파를 훑었어요. 그런 게 살과 피가 되고 잔 근육도 만들어준 셈이죠.” 바흐에서 시작해 모차르트로 갔고,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연주하기에 앞서 그 뿌리가 됐던 성악곡부터 탐구했다. 제자는 스승의 이런 학구적인 면모를 추앙했다. “선생님은 해석이나 설명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거든요. 그냥 논리를 전개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인 자료를 제시해요.” (진솔)

진솔은 통념적인 경로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큰 거 한 방’을 도모하며 모험도 주저하지 않는 쪽이다. 클래식에서도 눈길을 확 사로잡는 기획 공연에 치중했고, 게임 음악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지난해 드라마 ‘마에스트라’(tvN)에서 배우 이영애가 진솔을 지휘 트레이너로 선택한 것도 이런 당찬 면모 때문이었을까. “제 또래 예술가들은 여유가 없어요. 약간 무모해 보이는 프로젝트일지라도 그걸 두려워하지 않고 도모했으면 좋겠어요” 진솔은 “주변의 이런저런 얘기에 휘둘리지 않기로 했다“며 “눈치를 덜 봐야 예술계가 발전할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도전엔 정석대로만 살기 어려운 그 세대 청년들의 고민과 고단함이 녹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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