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사에서 무력으로 국왕을 교체하는 반정(反正)사건이 두 번 일어났다. 중중반정(1505)과 인조반정(1623)이 그것이다. 조선초 1·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등 정변이 있기는 했지만, 왕위 계승권자들 간의 왕권다툼이어서 반정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두 번의 반정 모두 무능하고 포악한 왕을 몰아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반정후 정치구조나 제도의 변화는 전혀 없었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그저 지배층간의 정치투쟁과 권력교체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욱이 반정의 주역들이 온갖 특혜를 독식하면서 오히려 역사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 놓은 사건이다.
인조반정의 거사일은 1623년(광해군 15) 음력(이하 음력) 3월 13일로 정해졌다. 거사의 주모자들은 전날 2경(밤 10시 전후)까지 홍제원(무악재 밖 국영여관)에 군대를 집결시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조반정, 인목대비 폐모 반대하다가 죽은 백사 이항복 제자들이 주도
반정은 전 강계부사 김류(1571~1648)와 전 평산군수 이귀(1557~1633)를 두 축으로 해서 전 병조좌랑 최명길(1586~1647), 전 한림 장유(1587~1638), 유생 김자점(1588~1651), 전 승지 홍서봉(1572~1645), 유생 심기원(1587~1644) 등이 주도했다. 주모자는 대부분 백사 이항복(1556~1618)의 제자들이다. 이항복은 인목대비 폐모를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갔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반정세력들은 중풍을 앓아 반신불수가 된 스승 이항복을 광해군(재위 1608~1623)이 기어코 귀양까지 보내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인조(능양군·재위 1623~1649)도 초반부터 적극 참여했다. 능양군은 동생 능창군1599~1615)이 신경희(?~1615) 옥사사건에 연루돼 목숨을 잃은 뒤 아버지 정원군(1580~1619)이 화병으로 죽자 광해군에 원한을 품었다.
인조반정은 운좋게 성공했다. 김류와 이귀 정도를 빼고는 참가자 대다수가 당시로서는 별 볼일 없는 무명의 인물들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거사 3년 전인 1620년(광해군 12) 모의가 시작된 이래 수차례 고변이 있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무시했다. 거사 당일 홍제원에 집결키로 한 일도 이이반(?~1623)의 고변으로 사전에 탄로가 났다. 광해군은 보고를 받고도 유흥을 즐기느라 체포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인조실록> 1623년(인조 1) 3월 13일 기사는 “이이반이 드디어 고변하니 이것이 바로 12일 저녁이었다. 그리하여 추국청을 설치하고 …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하였지만 광해는 바야흐로 후궁과 곡연(曲宴·궁중연회의 일종)을 벌이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 일을 미루어 두고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귀, 김자점, 전 곡산부사 한교(1556~1627) 등이 먼저 홍제원에 도착했지만 모인 병력은 겨우 수백명에 불과했다. 고변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후 대장 김류 등 주력부대가 현장에 나타나지 않자 군중이 크게 동요했다. 김류가 뒤늦게 합류하고 장단부사 이서(1580~1637)가 이끄는 정예군대 700여 명이 추가로 도착하면서 사기가 다시 고조됐다. 총병력 1400여명의 반정군은 창의문을 돌파해 도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실록은 “밤 3경(12시 전후)에 창의문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다가 성문을 감시하는 선전관을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렀다”고 했다.
창덕궁 수비는 훈련대장 이흥립(?~1624)이 총괄했다. 이흥립은 반정군 편이었고 반정군은 아무런 저항없이 손쉽게 창덕궁 안으로 진입했다. 창덕궁을 장악한 반정세력은 즉시 광해군을 찾았다. 광해군은 북쪽 후원문을 통해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도망쳤지만 안국신의 신고로 붙잡혔다. 실록은 “광해군이 체포 당시 상중이던 안국신의 상복을 입고 있었다”고 했다. 폐세자 역시 도망쳐 숨었다가 반정군에 체포됐다. 어둠 속에서 광해군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화로 정전인 인정전을 제외한 창덕궁의 주요 전각이 모두 불타버렸다.
반정세력이 내건 거사의 가장 큰 명분은 폐모였다. 따라서 경운궁에 유폐된 인목대비(1584~1632)부터 복위시키고 이어 그녀의 승인을 받아 법궁인 창덕궁 인정전에서 새로운 왕의 즉위절차를 밟으려고 했다. 이같은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있던 인목대비는 창덕궁으로의 행차를 바라는 반정세력의 집요한 요청을 끝내 거부하며 능양군의 왕위계승을 쉽사리 승인하지 않았다. 능양군이 직접 말을 타고 경운궁으로 달려와 머리숙여 절하자 비로소 사군(嗣君·선왕의 대를 물려받은 임금)으로 인정하며 옥새를 내주었다. 광해군은 목숨을 부지한 채 부인인 중전 유 씨(유희분의 누이동생)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됐다. 폐세자 부부 역시 강화도에 연금됐다. 폐세자 이지(1598~1623)는 얼마 후 땅굴을 파다가 발각돼 자진하라는 명을 받고 목을 매 죽었으며 폐세자빈 박 씨(박자흥의 딸)도 따라 죽었다.
광해군은 1623년 10월 부인 유 씨 마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1641년(인조 19) 7월 1일 제주도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할 때까지 기나긴 유배생활을 홀로 견뎌야 했다. 광해군이 남긴 혈육은 숙의 윤 씨에게서 얻은 딸 하나뿐이었다.
인조반정후 명분과 의리 중요시 하는 서인세력들 정국 주도하면서 병자호란 자초
광해군 말엽의 정국을 주도한 북인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자결했으며 목숨을 겨우 건진 나머지 북인들도 투옥되거나 유배되면서 붕당으로서 존재의미를 완전히 상실했다. 대신 반정에 참여한 서인 세력들이 조정에 대거 포진하게 됐다. 북인들은 실천을 앞세우는 남명 조식(1501~1572)의 제자들이었지만 서인들은 실리보다는 형이상학과 명분을 중요시하는 정치철학을 추구했다. 중국 대륙의 주인은 바뀌고 있었지만 서인이 장악한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끝내 고집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최대 병화인 병자호란을 당하게 된다.
중종반정은 더욱 일사천리로 전개됐다. 중종반정은 1505년(연산군 12)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이른바 삼대장이 주도했다. 박원종(1467~1510)은 부친 박중선이 세조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참여해 적개공신 1등에 책봉됐고 누나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 이정의 부인이었다. 이같은 집안에 힘입어 음보로 벼슬을 시작해 연산군대 병조참의(정3품 당상관), 한성부 우윤(종2품), 지중추부사(정2품), 경기도관찰사 등 요직을 지냈다. 성희안(1461~1513)은 문과 출신으로 그 역시 연산군 때 형조·예조참의, 형조·이조참판(종2품) 등 청요직 엘리트 관료의 길을 걸었다. 유순정(1459~1512)은 문과를 장원으로 합격했지만 연산군 재위시 평안도 병마절도사(종2품), 공조·호조참판, 이조판서(정2품) 등을 지냈다. 삼대장은 각자의 길을 걸었으며 서로 돈독한 관계가 전혀 아니었다.
반정을 처음 기획한 사람은 성희안이었다. 성희안은 연산군 말년에 왕에게 여러 번 밉보여 좌천되면서 원한을 품었다. 연산군이 아차산 사냥을 갔을 때 성희안은 호위대장을 맡았다. 그런데 사냥 구역에 잡인이 출입했고 연산군은 단속을 제대로 못했다며 곤장을 때렸다.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군 10) 10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의금부가 “성희안은 대장으로서 군율을 어겼으니 죄가 장 100대에 해당한다”고 아뢰자 연산군은 “그 율로 죄를 주라”고 명했다. 연산군은 성희안이 지은 시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도 했다. <연산군일기> 1504년 12월 18일 기사에 따르면, 성희안이 “말을 타고서도 항상 싯구를 생각한다”라고 읊자 연산군은 정승들과 승지들 앞에서 “재주를 자랑하는 것이 너무도 졸렬하다”고 면박을 줬다. 조선중기 문신 이자(1480~1533)의 <음애일기>와 실록 등 기록을 종합하면, 성희안은 평소 박원종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반정의 성공을 위해 그에게 먼저 접근해 승낙을 받는다. <음애일기>는 반정 참여 제안을 받은 박원종이 “밤낮으로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는 일”이라고 반겼다고 기술한다. 유순정과, 삼대장과 인연이 있던 군자부정 신윤무, 군기시 첨정 박영문, 수원부사 장정, 사복시 첨정 홍경주 등이 합세하면서 반정수뇌부가 구성됐다.
폭군 몰아내기 위한 중종반정, 물리적 충돌 없었고 합류자들 시간 갈수록 눈덩이처럼 증가
드디어 1505년(연산군 12) 9월 1일 저녁 모두 훈련원(종로 을지로 6가 국립중앙의료원)에 모였다. 애초 거사일은 9월 2일이었다. 연산군이 장단석벽에 행차하기로 한 날이다. 장단석벽은 명승지로 유명한 연천 주상절리를 말하며 연산군은 이곳에 별궁을 지었다. 하지만 행사가 취소되면서 거사사실이 누설될까 염려해 하루 앞당겨 거병했던 것이다.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음애일기>, <기묘록속집>에 소개된 반정경위를 시간대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반정군은 훈련원에서 연산군이 있는 창덕궁을 향해 이동하다가 3경(자정 전후) 무렵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下馬碑洞·종로 명륜동)에 진을 쳤고 이 소식이 빠르게 퍼지면서 문무백관들과 군민이 반정군 대열에 합류했다. 진성대군(중종·재위 1506~1544)의 사저(어의동본궁·종로 효제초교)로 가서 진성대군을 호위했다. 진성대군은 처음에는 자신을 죽이러 온줄 알고 겁을 먹었다. 경복궁에 가서 대비 정현왕후(1462~1530·자순대비)에게 거사사실도 보고했다. 동시에 군사를 보내 임사홍과 좌의정 신수근(연산군의 아내인 폐비 신 씨 오빠), 형조판서 신수영(신수근의 동생)을 그들의 집에서 척살하고 개성유수 신수겸(신수근의 동생) 역시 개성부에서 처단했다. 전동, 심금손, 강응, 김효손 등 연산군의 핵심 나인들과 그 척족들도 끌고와 군중에서 참형에 처했다. 창덕궁 밖이 소란하자 궁궐을 지키던 장사와 시종·환관들이 앞다퉈 수채 구멍으로 빠져나가 순식간에 궁궐은 텅 비었다. 상황을 보고받은 연산군은 승지의 손을 잡고 떨면서 말도 하지 못했다. 승지들도 바깥 동정을 살핀다고 핑계대고 모두 달아나버렸다.
반정군은 이튿날 날이 밝자 창덕궁 궐문 앞으로 진군했으며 돈화문과 창덕궁 주변에 경비를 세워 연산군의 탈출을 막았다. 미시(오후 2시 전후)에 경복궁에서 연산군을 폐위하는 대비의 교지가 반포되고 신시(오후 4시 전후)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성대군의 즉위식이 거행됐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옮기고 폐비 신씨는 사저로 내쫓았으며 세자 이고(1498~1506)와 모든 왕자들도 각고을에 안치했다. 또한 연산군이 총애하던 전비(숙용 전 씨), 장녹수, 백견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기시(프레스센터) 앞에서 참수했다. 연산군은 유배지에서 두어달 살다가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고 폐세자와 왕자들은 1506년(중종 1) 9월 24일 사사됐다고 실록은 서술한다.
어렵게 성공한 인조반정, 공신들에 특전 남발하고 양반의 납세·병역까지 면제 폐단
연산군은 폭정으로 관료들과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았다. 따라서 중종반정은 단 한 차례의 군사적 충돌도 벌어지지 않았고 반정소식이 퍼지자 순식간에 합류자들이 몰려들었다.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병조판서 이손, 도승지 강혼, 연산군의 총신이던 한성판윤 구수영 등 연산군의 측근 인사들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반정에 가세했다. 훈련원 회합에서 새로운 왕이 즉위까지 2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반정과정에서 조정의 신료와 종친 대부분이 참여하면서 117명이라는 역대 최대의 공신책봉(정국공신·靖國功臣)이 단행된다. 공신들이 정국을 장악하게 되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가 등장하면서 훈구파와 사림간 대립이 격화되고 극심한 정치혼란이 초래된다.
반정은 무엇보다 공신들에게 과도한 특전을 몰아줘 폐해가 컸다. 극적으로 반정에 성공한 인조반정이 특히 그랬다.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사대부들도 조선 백성으로서의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양반관료가 기본의무에서 해방된 것이 인조반정 이후부터다. <일성록>은 정조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다. 이에 따르면, 정조는 양반들에게 조세·군역이 부과되지 않는 것을 개탄했다. <일성록> 1799년(정조 23) 기사에서 정조는 “옛날에는 종1품 이하가 모두 군포(軍布·현역복무하지 않는 대신 내던 세금)를 냈다. … 인조반정 후에 연평부원군 이귀 등 여러 훈신들의 말로 인해 혁파하였다. 지금 군역에 응하는 자는 어디에도 호소할데 없는 소민(小民)들 뿐이니 양인 장정을 어떻게 충원할 것인가”라고 했다. 조선은 인조반정을 기점으로 역사의 진보를 거부한채 퇴행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음애일기(이자), 일성록
2. 중종반정 핵심 주동자들과 반정 경위에 대한 검토. 송웅섭. 조선시대사학보(제92호). 조선시대사학회.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