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현의 재난백서] 끓는 지구 그리고 화재
냉방기기 화재와 자연 발화 증가
기온 상승으로 화재 늘어날 수도
참 덥습니다. 오늘은 그래도 어제 내린 비 덕분에 조금 선선해졌지만, 지난주는 밖에서 걷기 힘들 정도로 푹푹 찌는 폭염이 이어졌습니다. 아직 6월, 여름의 초입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올해 새로운 기록을 세울진 모르겠지만, 최근 10년간 가장 더웠던 여름은 2018년이었습니다. 서울은 8월 1일 한낮 최고 기온이 39.6도를 기록하면 관측 사상 가장 높았습니다. 최고기온이 33도를 넘어가는 폭염도 35일이나 발생했습니다. 30년 평년 수치가 8.8일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죠? 관측 사상 가장 높은 기온도 나왔습니다. 강원도 홍천이 무려 41도까지 올라갔죠.
기록적인 더위는 예상치 못한 불청객을 불러왔습니다. 바로 불입니다.
2018년 대한민국은 낮에는 폭염, 밤에는 열대야에 시달렸습니다. 서울은 7월 21일부터 8월 15일까지 무려 26일 동안 열대야가 이어졌습니다. 밤낮 할 것 없이 집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더웠던 거죠. 더운 날씨에 에어컨과 선풍기를 비롯한 냉방기기는 쉴 새 없이 돌아갔고 사용량 증가는 화재로 이어졌습니다. 2020년 에어컨 화재는 221건, 선풍기 화재는 99건이 일어났고, 2018년은 에어컨 화재가 262건, 선풍기 화재는 148건이 발생했습니다. 폭염이 2차 화재를 만든 겁니다.
더위는 냉방기기 화재만 몰고 온 게 아니었습니다. 강렬한 햇살은 스스로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물건에 의해 빛이 굴절돼 한곳에 모이면 위력은 더 강력해지죠.
지난 3월 10일 부산의 날씨는 아주 맑았고, 햇살은 화창했습니다. 당시 캣타워 주변에서 불이 났는데, 원인은 바로 햇빛 때문이었습니다. 캣타워의 투명 해먹에 물이 고여있었는데, 투명 해먹과 고인 물이 볼록렌즈의 역할을 했고 빛이 한점에 모여 주변에 있는 잡초에 불을 붙였습니다.
부산 강서소방서에서 비슷한 조건을 만들어 실험을 해보니 해먹 아래 빛이 모이는 곳의 온도는 500도 넘게 올라가 톱밥을 쉽게 태웠습니다. 수건과 소파도 구멍이 뚫렸죠.
반려동물이 쓰는 투명한 물그릇도 같은 원리로 불을 붙일 수 있고, 거울도 주의해야 합니다. 화장할 때 쓰는 확대 거울은 오목거울로 만들기 때문에 빛을 한곳으로 모읍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화장 거울을 창가에 뒀다가 태양열 때문에 창틀이 타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런 돋보기 효과 화재는 햇살이 강하게 내리쬘수록 쉽게 발생하고, 햇살이 강한 날은 기온도 높죠. 돋보기 화재와 여름철 평균 기온 그래프를 볼까요. 2018년 다른 해에 비해 평균 기온이 1도가량 높았고 돋보기 효과 화재 건수 역시 가장 많았습니다.
돋보기 효과뿐만 아니라 더위에 열이 차차 쌓여 불이 붙기도 합니다. 폐기물 업체가 쌓아둔 물건이 갑자기 불에 타고, 공장에 쌓아둔 보온재에서도 불이 붙었습니다. 2018년 태양열로 인한 자연발화 화재는 120건으로 2017년(60건)에 비해 두 배나 많이 발생했습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UN사무총장은 "지구 온난화(warming) 시대가 끝나고 '끓는'(boiling)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했습니다.
2023년은 지구 표면 온도가 관측 이래 가장 더운 해였습니다. 세계기상기구는 2023년은 산업화 이전 시기보다 1.45도 높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넘으면 안 되는 선으로 정했던 상승 폭 1.5도도 넘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까지 나왔습니다.
이미 우리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지구 곳곳에서 유례없는 수준의 더위와 싸우고 있고, 우리나라도 폭염 관련 기록이 매년 새롭게 갈아 치워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연’ 발화는 사실 ‘사람’이 만든 화재가 아닐까요.
[ 강세현 기자 / accent@mb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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