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닮은 챗봇, 과연 이 방향이 맞을까? [평범한 이웃, 유럽]
역사는 필연의 산물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의 갈래 중 몇 가지 우연과 의지가 겹쳐 하나의 길로 뻗어 나간다. 과학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요즘 인공지능(AI)이라고 하면 챗지피티(ChatGPT)로 상징되는 거대언어모델(LLM) 붐이 우선 떠오르지만, 컴퓨터 과학계에서 오랫동안 AI를 상징해온 것은 체스를 두는 컴퓨터, 즉 ‘체스 엔진’이었다. 컴퓨터의 체스 실력이 곧 AI의 발달을 가늠하는 지표로 쓰였다. 역사는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였던 클로드 섀넌이 쓴, ‘체스 경기를 위한 컴퓨터 프로그래밍(Programming a Computer for Playing Chess)’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출발점이다.
섀넌은 논문 도입부에서 체스 프로그램 개발이 실용성은 없다 해도 이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띠는데, 비슷한 성격을 가진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섀넌은 체스 엔진이 차후 컴퓨터의 발달에 이상적인 이유로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 해결해야 하는 문제(말을 이동시켜 체크메이트라는 목표를 달성)가 명확히 정의되어 있다. 둘째, 해결책을 찾기가 너무 간단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셋째, 능숙한 체스 플레이를 하려면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계화된 생각이 가능하다고 인정하거나, ‘생각’에 대한 개념을 더 제한해야 한다. 넷째, 체스의 이산적(離散的·0, 1, 2 등 서로 단절된 값의) 구조가 현대 디지털 컴퓨터의 특성에 맞다.
섀넌은 AI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왜 컴퓨터 연구에 체스가 필요한지 구구절절 설명했다. 이런 특징을 가진 다른 게임도 많은데 굳이 체스를 선택한 이유는 어쩌면 그가 열렬한 체스 팬이었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추측일 뿐이다. 어쨌든 이 논문은 AI 체스 알고리즘의 이론적 기반이자, 최초의 컴퓨터 체스 알고리즘을 제시했다는 역사로 남았다. 이후 오랫동안 체스 경기력이 AI 성능과 사실상 동일시되었다. 1960년대 체스 엔진이 현실화되었고, 1970년대 말 가정용 체스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1987년 독일 회사 ‘체스베이스’ 덕에 과거 체스 데이터 검색이 가능해졌고, 이로부터 오프닝 등 체스 관련 이론이 크게 발전했다.
“체스는 AI계의 초파리다(Chess is the drosophila of 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표현은 20세기 후반 내내 컴퓨터 과학자들 사이에서 흔히 쓰였다. 이 표현은 AI에 관심이 많았던 소련의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인 알렉산더 크론로드가 처음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존 매카시는 AI 관련 연구로 컴퓨터 과학계의 노벨상이라 일컬어지는 튜링상을 받았는데, 그는 아예 ‘AI계 초파리로서의 체스(Chess as the drosophila of AI)’라는 논문까지 썼다. “초파리 한 세대를 기르는 데 2주밖에 안 걸리고, 한 병에 초파리 수천 마리를 가둬놓을 수도 있으며, 기르는 데 돈도 적게 든다”라는 비유를 들며, 그는 체스가 마찬가지 이유로 AI 발달의 합리적 도구라고 옹호했다. 초파리 덕에 유전학에서 비약적 발전이 있었듯, 그 자체로는 별것 아닌 체스가 AI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나 섀넌, 크론로드, 매카시 같은 인물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왜 AI 연구에 체스를 도구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꾸준히 제기됐다.
체스와 AI의 관계가 정점을 찍은 것은 1990년대 말이다. 당시 세계 체스 챔피언이던 러시아의 가리 카스파로프와 IBM이 만든 체스 컴퓨터 ‘딥블루(Deep Blue)’가 맞붙었다. 이 둘의 매치는 1996년과 1997년, 두 번 이뤄졌다. 각 매치는 여섯 차례 게임으로 이뤄졌는데, 1996년 첫 번째 매치에선 카스파로프가 4-2로 승리했다. 1997년 열린 재대결에서는 3.5-2.5로 딥블루가 이겼다.
기계가 인간을 이긴 최초의 매치
미디어가 대대적 관심을 쏟고 사람들이 지금도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은 두 번째 매치다. 기계가 인간 챔피언을 이긴 최초의 매치였기 때문이다. 섀넌이 컴퓨터 체스 알고리즘을 제시한 이래 반세기 만의 성과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매치에서 카스파로프가 보인 반응이다. 공격적인 경기 방식으로 유명한 카스파로프는 첫 번째 매치 때 어떤 컴퓨터도 자신을 이길 수 없다며 자신만만해했다. 예상대로 이기긴 했지만 경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았던지, 카스파로프는 “우리는 지금 양이 질이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처음 목도하고 있다” “어떻게 거기 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컴퓨터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라며 딥블루의 놀라운 성능에 감탄했다(〈뉴욕타임스〉 1996년 2월12일, 1997년 5월9일 인터뷰).
다음 해인 1997년 같은 방식으로 치른 경기에서 딥블루에 패한 뒤, 카스파로프는 “신의 손(the hand of god)”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신의 손’이란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디에고 마라도나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경기에서 왼손으로 공을 넣었던 일에서 나온 표현이다. 심판이 이를 보지 못하고 골로 인정하는 바람에 아르헨티나의 승리로 이어졌다. 마라도나 입장에서는 ‘신’이지만 반대편이 보기엔 ‘사기’다. 카스파로프는 이 표현을 통해 딥블루에 사람 등 다른 영향이 작용했다는 의심을 내보인 것이다. 카스파로프는 IBM에 세 번째 대결 의사를 밝혔지만 ‘신의 손’ 운운이 거슬렸던 IBM 측에서 이를 거절했다.
경기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건 카스파로프만이 아니었다. 카스파로프를 “인류의 희망”으로 묘사한 많은 언론이 AI가 지배하는 어두운 미래를 우려했다. 당시 세계 여성 체스 챔피언인 수잔 폴가르는 자신이 딥블루와 붙어보겠다면서 “여성의 본능”을 이용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스파로프나 폴가르도 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의 손’이나 ‘여성의 본능’은 기계 앞의 불안을 누르려는 허황된 말이었다. 오랫동안 체스를 ‘AI의 초파리’로 설정하고 거기에 매달려온 IT 업계는 딥블루의 승리를 환영했으나, 동시에 명이 다한 초파리 대신 새로운 초파리를 구해야 한다는 과제를 받아들었다. 딥블루의 성공은 무차별 대입 공격(brute force)이나 계산능력 덕이지 인공지능 때문이 아니라는, 컴퓨터 과학자 데이비드 겔렌터 같은 이들의 폄하도 만만찮았다.
그래서 AI 연구자들의 관심이 옮겨간 곳이 바둑 영역이다. 둘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체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고, 논리나 계산에 더해 창의성까지 작용한다고 여겨지는 게임이라서다. 바둑 AI 연구는 2016년 구글 딥마인드의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는 한국인이라면 더 잘 알 것이다. 다섯 차례 경기에서 4승 1패로 알파고가 승리했다. 딥마인드를 이끌던 데미스 하사비스는 대국 후 이런 트윗을 올렸다. “#AlphaGo WINS!!!! We landed it on the moon(알파고 승리!!!! 우리는 달에 착륙했다).” 이세돌은 “알파고가 확률 계산에 기반한 단순한 기계인 줄 알았는데 생각을 바꿨다. 알파고는 확실히 창의적이다”라고 평가했다(알파고 웹사이트).
컴퓨터와 거리 두는 차기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프의 ‘생각’이나 이세돌의 ‘창의적’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 비유인지는 차치하고, 체스나 바둑을 두는 AI가 인간의 경기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카스파로프가 딥블루에 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체스는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제 어지간한 체스 엔진도 인간 챔피언을 쉽게 이기는 수준이기 때문에, 고수들도 엔진을 이용해 새로운 수를 배운다.
환경도 변했다. 온라인 체스가 활성화되고 트위치 같은 인터넷 중계 플랫폼이 생기면서 체스는 재전성기를 맞았다. 2020년 팬데믹으로 인한 격리, 〈퀸즈 갬빗〉 같은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도 체스의 부활에 영향을 미쳤다. 실시간으로 놓는 수에 따라 이길 가능성을 막대그래프로 보여주는 체스 엔진은 과거의 체스 경기에서는 없던 긴장감을 더했다. 경기 해설을 하는 그랜드마스터들은 들쭉날쭉 길이가 변하는 막대를 보며 인간이 내다보지 못하는 수십 수 앞을 계산하는 컴퓨터의 분석을 짐작하려고 안절부절못한다. 컴퓨터 덕에 경기를 더 흥미롭게 볼 수 있게 됐지만 어두운 면도 있다. 속임수, 즉 치팅이다. 휴대전화 안까지 들어온 체스 엔진 때문에 온라인, 오프라인 체스 경기가 치팅으로 얼룩지고 있다. 현재 체스 업계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속임수 쓰는 것을 방지하느냐다.
그런 점에서 올해 말 열리는 세계 체스 챔피언 도전자인 도마라주 구케시(인도, 18세)는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세계 체스 챔피언십은 챔피언 후보자들이 토너먼트를 벌여 그 우승자가 현 챔피언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구케시는 후보자 토너먼트에서 역대 최연소로 우승한 선수다. 현 챔피언인 딩리런(중국, 32세)이 요즘 경기력이 떨어져 있어, 이대로라면 구케시가 최연소 세계 체스 챔피언이 될 가능성이 높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다른 선수들과 달리 구케시가 체스 엔진을 훈련용으로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곱 살에 체스를 시작한 이후 체스 레이팅이 2550에 오를 때까지(구케시의 현 레이팅은 2763이다) 컴퓨터의 도움 없이 스스로 전 경기를 분석했다고 한다. 그의 코치인 그랜드마스터 비슈누 프라사나는 인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이 “일종의 실험”이었다고 말했다. 정확한 계산과 직관력을 길러야 했는데, 컴퓨터가 알려주는 명확한 결과가 실제 경기에서 좋은 수를 찾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어 엔진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케시가 컴퓨터의 분석을 참고한 건 최고 레벨에 오른 다음이었다.
차기 체스 챔피언 후보가 컴퓨터와 거리를 두는 동안, AI 업계는 새로운 ‘초파리’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인간을 닮은 챗봇이 그것이다. 얼마 전 오픈AI가 GPT-4o(지티피 포오)를 공개했을 때 사람들은 실시간 목소리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발달한 챗봇에 경탄했다.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살아 있는 존재라고 착각할 정도쯤 되어야 충분히 발달한 AI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나마 섀넌은 체스에 주목한 이유를 네 가지나 내놨는데, 현재 AI 업계를 이끄는 이들은 왜 그토록 인간성에 집착하는지 밝히지 않는다. 인간관계나 직업 시장의 근본적 변화, 개인정보 침해 같은 문제의 대비책도 물론 없다. 과연 이 방향이 맞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체스라는 초파리가 지난 반세기 AI를 지배했다. 챗봇의 인간성을 새로운 초파리로 써도 될까.
취리히·김진경 통신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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