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해야 한다 [여여한 독서]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윌북 펴냄
베스트셀러 과학 에세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지음, 곰출판)를 보는데 세 가지 생각이 들었다. 글발 좋다! 하는 감탄이 첫째. 물고기가 존재한다는 거야 안 한다는 거야? 의문이 둘째. 이 책에 영감을 줬다는 〈자연에 이름 붙이기〉를 읽고 싶다는 소망이 셋째. 세 번째가 가장 컸는데 지난가을 번역본이 나와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
책은 두꺼웠고 저자 캐럴 계숙 윤은 생태학과 진화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과학자다. 재미는 없겠구나. 마음을 다잡고 읽기 시작했는데 웬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보다 재밌다. 그 책처럼 현란한 글솜씨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명쾌하고 산뜻한 필치로 풍요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엇보다 물고기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다니, 20년 넘게 〈뉴욕타임스〉에 글을 연재한 과학 칼럼니스트답다.
과학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인 캐럴 계숙 윤은 숲에서 동식물과 어울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생물학자가 됐다. 그리고 자연스레 생물들 사이의 관계를 나누고 질서를 연구하는 분류학의 세계로 들어섰다. 진화적 유연관계로 생물을 분류하는 이 세계는 그가 경험으로 알던 세계와는 전혀 달랐다. 여기엔 물고기, 즉 어류가 존재하지 않았다. 물고기만이 아니라 얼룩말도 나방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년기부터 체득한 생명 세계에 대한 자신의 감각과는 어긋나는 결론이었지만 과학자인 저자는 이를 신뢰했다. 과학적 결론이고 과학은 신뢰해야 하니까.
그는 자신이 공부한 현대 과학과 세계 곳곳에서 오랫동안 행해진 비과학적 분류를 비교해 사람들의 엉뚱한 상식을 보여주기로 맘먹었다. 세상엔 괴상하고 다양한 분류법이 많았다. 생물을 “생각하는 것/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 나는 것” 식으로 나누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뉴기니의 카람족처럼 ‘동물’이란 범주 자체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인류학자들은 이미 민속 분류학이라 해서 이런 다양한 분류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윤은 과학적 기준이 없으니 분류도 제멋대로일 거라 여기며 민속 분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조사를 계속하면서 그는 전혀 달라 보이는 다양성 아래 깊고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음을 알았다. 무질서할 줄 알았던 전 세계 민속 분류학 사이에 일관된 규칙이 존재했던 것이다.
직관적으로 이루어진 분류가 일관성을 갖다니! 놀람은 과학적 분류학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신뢰에 치명타를 가한 것은 뇌손상 환자들에 관한 심리학 연구였다. 뇌의 특정 부위가 손상된 이들이 생물들을 알아보거나 구분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음식을 먹는 단순한 일에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연구 보고였다. 이 환자들의 존재는 생물 분류학이 인간으로 살기 위한 필수적인 기능이자 선천적 행위임을 일깨웠다. 저자는 비로소 분류가 과학이 아닌 생존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며, 수천, 수만 년간 이어져온 기존 분류법에는 ‘비과학적’이란 말로 폄훼할 수 없는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자인 그가 마침내 만난 것은 ‘움벨트(umwelt)’라는 전혀 다른 시각이었다.
개와 고양이 구분하게 하는 ‘움벨트’
움벨트란 “지각된 세계”로서 “현실 자체의 경계선을 정하고, 그 세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포함해 생명의 세계 안 존재들의 위치를 결정한다”. 쉽게 말해서 움벨트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생명 세계를 보는 눈이다. 유아들에 관한 심리학 연구가 보여주듯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생물에 매료되고 구별하기 시작한다. 개와 고양이를 직관적으로 구분하는 아기의 능력은 우리가 움벨트를 가졌다는 증거다. 그리고 움벨트를 갖고 있다는 건 주변의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뜻이며 세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안다는 걸 의미한다.
이 책에는 칼 린나이우스로 시작해서 찰스 다윈, 에른스트 마이어로 이어진 진화분류학, 로버트 소칼의 수리분류학, 분류학의 토대 자체를 바꾼 분자생물학까지 근현대 분류학 역사가 이해하기 쉽게 정리돼 있다. 그 역사는 지난 200여 년간 분류학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움벨트를 배제, 배척하고 우리에게서 물고기를 빼앗았는지 보여준다.
생물학자인 저자는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과학을 이해하면서도, 움벨트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물고기는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고래를 물고기라 여겼던 사고방식도 인정하자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올바른 기준, 질서가 아니라 생명 세계와 연결된 비전이기 때문이다. 수만 년 아니 수십만 년 동안 인간이 생존해온 건 생명과 직관적으로 연결된 움벨트의 비전 덕분이었고, 오늘날 우리의 생존이 위태로워진 건 그것을 잃은 탓이기 때문이다.
최첨단 과학 장비를 사용해 움벨트에서 완전히 벗어난 분류학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지만, 저자는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 게 낫다고 단언한다. 그의 말처럼, 개념의 추구가 생명 자체의 추구를 압도할 때, 우리가 생명의 세계를 자신의 시각으로 볼 수 없게 됐을 때, 우리는 생명과 단절된 채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대멸종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지경이 됐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개념의 추구가 아니라 죽어가는 우리의 생명 세계를 살리는 것이다. 자연에 생생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를 위한 첫걸음이다.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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