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바람핀 남편과 또…‘강박적 사랑’이 만든 400억대 작품 [0.1초 그 사이]

2024. 6. 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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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멕시코 국보’ 프리다 칼로
경매서 413억원 낙찰…라틴 작품 최고가
삶의 고난, 예술적 천재성으로 발현
“디에고는 나의 뮤즈”…한눈 팔아도 재결합

[0.1초 그 사이]는 역대급 몸값을 자랑하는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한 작품이 명성을 얻게 되는 데는 작품성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안목이 뛰어난 컬렉터나 큐레이터의 손을 거치는 것은 물론 스캔들, 법적 분쟁, 도난 사건, 심지어 예술계를 뒤흔든 저항까지…. 작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이처럼 다양합니다.


그리고 평판 높은 이런 미술품들은 단 0.1초 차이로 행방이 갈라지게 되죠. ‘찰나의 순간’으로 승부가 나뉘는 치열한 미술시장에서 선택받은 그림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드립니다.

프리다 칼로.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소아마비로 절뚝거리게 된 오른 다리, 온몸의 뼈를 으스러뜨린 처참한 교통사고, 평생에 걸친 서른다섯 번의 수술, 끝내 포기한 꿈, 하반신 마비, 21살 연상의 이혼남과 결혼, 세 번의 유산, 남편의 잇따른 외도, 심지어 내 여동생과의 불륜, 이혼, 그러나 전 남편과의 재결합, 오른 다리 절단.

인생이 그야말로 ‘고통 그 자체’로 점철된 화가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토록 기구한 운명에 신을 원망하며 절망했을 테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나는 그처럼 그릴 수 없다.”

현대미술의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가 이렇게 대놓고 극찬한 몇 안 되는 천재이자,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을 그린 여성 작가, 루브르 박물관이 처음으로 작품을 구입한 남미 예술의 주인공,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작품이 내걸린 멕시코의 국보.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입니다.

프리다 칼로, 부상당한 사슴, 1946.
시련으로 점철된 인생…천재성 폭발 계기

프리다만큼 삶이 시련으로 들어찬 작가는 드물 겁니다. 아픔의 크기를 재는 것만큼 무의미한 게 없다지만, 프리다의 인생사를 읊자면 그 누구라도 입을 다물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고독하게 자신의 고통을 응시하게 만드는 일련의 사고와 사건은 역설적이게도 프리다의 천재성을 폭발시켰습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 없는 독학 작가이자 신체적 장애를 가진 제3세계 여성, 다시 말해 ‘비주류의 상징’인 프리다가 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세계적인 작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던 건데요.

우선 프리다의 그림부터 먼저 감상해 볼까요. 그가 마흔둘에 그린 ‘디에고와 나’(1949) 입니다. 미간까지 연결된 짙은 갈매기 눈썹, 목을 조이는 듯 보이는 거친 흑발, 옅은 콧수염, 정면을 똑바로 바라본 강렬한 눈빛, 의미를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 그리고 눈물.

프리다 칼로, 디에고와 나,1949. [소더비]

네, 프리다 자신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마에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디에고의 초상에 그려진 ‘제3의 눈’이 강렬하게 화면을 뚫고 나오는데요.

이 그림은 디에고가 멕시코의 유명 여배우인 마리아 펠릭스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을 때 즈음 그려진 프리다의 마지막 자화상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바람을 피워도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눈, 바로 심미안을 가진 위대한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이 한 점의 자화상만으로도 디에고에 대한 프리다의 굉장히 복합적인 감성이 읽히기 때문이죠. 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이중, 삼중 의미를 담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그런데 이 그림이 불과 3년여 전 라틴아메리카 현대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경신하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지난 2021년 1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3490만달러(약 413억만원)에 낙찰된 겁니다. 이전 경매 낙찰가가 1990년 기록한 100만달러였으니, 30여 년 만에 작품 값이 35배나 뛴 건데요.

디에고 리베라, 경쟁자들, 1931. [뉴욕 현대미술관]

특히 이 작품은 프리다가 남편을 넘어선 작품이기도 합니다. 라틴아메리카 경매 최고가는 지난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980만달러에 낙찰된 디에고의 그림 ‘경쟁자들’이었거든요. 통쾌한 복수라 할만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작품은 올해 4월 개막한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장에 걸려 있습니다. 그것도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동, 남미 등을 아우르는 ‘초상’(Portrait) 전시 공간에 자신이 추앙해 마지않았던 디에고의 작품과 나란히 말이죠. 프리다는 이 작품이 75년 뒤,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미술제에 출품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었을까요.

최근 방한한 페를라 라바르테 프리다 칼로 미술관장도 헤럴드경제와 만나 “프리다는 한 마디로 ‘멕시코다움’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가”라고 전했는데요. 실제로 절망에서 피어난 그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다소 멀게만 느껴진 멕시코다움이 ‘강인함’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프리다의 고향 코요아칸에 위치한 프리다 칼로 미술관으로 ‘블루 하우스’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프리다가 태어나고 자란 집으로 파란 외벽은 디에고가 직접 페인트칠 해줬다.
“의사를 꿈꿨지만” 사고 후 모든게 바뀌었다

프리다는 1907년 7월, 멕시코시티 외곽에 있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네 자매 중 셋째로 태어났죠. 아버지는 프리다를 유독 예뻐했는데, 공부까지 잘했으니, 프리다는 당대 최고 학교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프리다는 의사가 되기를 꿈꿨고, 그 근사한 꿈은 프리다의 손에 잡힐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열여덟의 프리다가 하굣길에 탄 버스가 마주 오던 전차와 충돌하면서 그의 인생은 산산이 박살이 납니다. 이 사고로 그는 전차의 손잡이 봉이 그의 자궁을 관통해 뚫고 나오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척추와 쇄골, 늑골, 골반 골절에 오른 다리가 11군데나 부러지는, 그야말로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너무나도 큰 사고였습니다. 살아있는 게 기적이었죠. 그의 나날은 도통 끝나지 않는 수술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루도 안 아픈 날이 없었고 진통제를 달고 살아야 했습니다.

프리다 칼로, 부러진 척추, 1944.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프리다가 붓을 들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입니다. 그야말로 살고자 그린 것이죠. 그는 자신이 예술적 재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침대 위에서 처음으로 그린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 그림과 함께 몇 점을 들고 당돌하게 디에고를 찾아가기에 이르죠. 디에고는 프리다의 그림에서 작가의 면모를 엿보게 되고요.

그런데 대뜸 자신의 그림을 평가해 달라는 소녀의 당찬 모습이 디에고를 사로 잡았던 걸까요.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이끌렸고, 이내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사실 디에고를 향한 프리다의 지독한 사랑은, 사랑을 넘어선 이끌림이었던 것만 같습니다. 절망의 심연으로 빠진 열여덟 소녀 프리다의 첫 그림을 알아봐 준 첫 스승이자 멘토가 디에고였거든요. 당시 디에고는 멕시코의 잘나가는 민중화가였고요.

디에고는 프리다보다 21살이 많았고, 두 번의 이혼 경험이 있는 바람둥이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프리다에게 이러한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죠. “나의 디에고를 위해, 생명은 세상의 말 없는 선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환상이 아니에요. (중략) 오늘부터 우리의 마법, 사랑을 노래할 거예요.” 프리다의 당시 일기를 보면 디에고를 향한 순애보적인 사랑이 거침없이 읽히거든요.

디에고와 프리다.

그런데 프리다는 거듭된 만류에도 임신을 시도하고 실패를 거듭합니다. 프리다를 괴롭히는 디에고의 끝나지 않는 외도를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아이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만 같죠.

그렇게 프리다의 사랑은 끝내 애증으로 점철된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디에고의 바람기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거든요. 디에고는 “나는 이상하게도 한 여인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많은 상처를 주고 싶다”고도 말한 장본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막장 드라마 소재로도 다루기가 어려울 정도로 엽기적인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바로 아래 여동생과 불륜을 저지르기까지 하거든요. 프리다는 이 사실을 한참 후에나 알았고요. 당시 남편과 동생에게 느낀 배신감이 얼마나 큰 고통으로 다가왔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칼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고통으로 죽어가는 프리다의 내면은 그의 그림에서도 생생히 나타납니다.

“내 인생에는 두 번의 큰 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어린 시절 겪은 전차 사고고, 하나는 디에고를 만난 것이다. 두 사고를 비교하자면 디에고가 정말이지 더 최악이었다.”

프리다 칼로, 단지 몇 번 찔렸을 뿐, 1935.
‘돌고 돌아’ 다시 디에고…“그는 영원한 나의 뮤즈”

결국은 남편과의 이혼을 선택한 프리다. 그때부터 그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서른한 살의 프리다가 미술상 줄리앙 레비의 초대로 미국 뉴욕의 전시회에 참여했는데, 그때 세상에 처음 공개한 작품들이 미술계의 찬사를 받기 시작합니다. 디에고의 아내가 아닌 프리다라는 예술가로서 온전한 홀로서기였죠. 프리다의 그림에 반한 칸딘스키는 전시장에서 작품을 보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고통 속에서 작업한 자신의 그림이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작가로서 승승장구했지만, 프리다는 여전히 디에고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디에고와의 끈질긴 인연이 다시 그를 붙들어 매거든요. 갈기갈기 찢긴 마음, 그리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서도 프리다가 디에고를 놓지 못한 건 강박에 가까운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디에고를 향한 사랑인지 자기 자신에 대한 학대가 아닌지, 이 즈음되면 헷갈리기 시작하거든요.

프리다, 두 명의 프리다, 1939.

끝내 프리다는 디에고와 1년여만에 재결합하기에 이릅니다. 디에고는 끝내 바람을 또 피우기에 이르고요.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자기 자신보다 더 끔찍하게 사랑한, 어떤 숭고한 존재 같은 것이었을까요. 프리다의 일기에서도 “나의 디에고”라고 지칭하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드러납니다. 디에고에 대한 그의 사랑은 거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죠.

“디에고 시작, 디에고 제작자, 디에고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남자친구,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애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나, 디에고 우주. 일관성의 다양성.”

망가져 가는 육체와의 지리한 투쟁, 사랑의 배신 속에서 찾아간 자아. 두 가지 키워드로 요약되는 프리다의 삶을 보면, 그에게 고통은 일종의 통과의례인 건가 싶은데요. 그래서 프리다가 표현하는 미를 가리켜 ‘악마적 아름다움’이라고 지칭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고통을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제의이자 부활의 기반으로 여겼던 것만 같거든요.

다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지극히 현실을 담은 작품을 가리켜, 미술사는 프리다를 ‘초현실주의 작가’로 분류합니다. 프리다는 “초현실주의가 아니”라고 살아생전 누누이 부정했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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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 프리다 칼로, 비엠케이

프리다 칼로, 붓으로 전하는 위로, 서정욱, 온더페이지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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