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 피트도 진심이었네”...이제 ‘로제’의 시대가 온다 [전형민의 와인프릭]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됐습니다. 매년 듣는 소리라 어느새 식상해졌지만, 올해 역시 역대급 더위가 예정됐습니다. 매년 기후 위기로 인한 사상 초유의 날씨가 계속되다보니 오히려 그 노출 빈도 때문에 위기감이 반감되는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사람은 날씨가 더워질수록 음료를 찾게 됩니다. 더위 때문에 몸속 수분을 보충해야할 필요성을 느끼는 게 가장 기본적인 생리죠. 하지만 단순한 맹물만으로는 갈증을 해소하기엔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미 너무나도 다양한 음료가 시중에 있기 때문에 좀 더 자극적인 맛을 본능적으로 찾게됩니다.
더운 여름, 어떤 음료를 선호하시나요? 일반적인 경우라면, 맹물 대신 탄산이 들어간 음료 혹은 색다른 상큼함이 살아있는 음료를 찾게될텐데요. 오늘 와인프릭의 주제는 바로 이런 와인들 입니다.
실제로 음료의 폭이 지금처럼 넓지 않던 중세에서 근대까지, 와인 문화권이었던 서양에서는 와인을 갈증 해소용 음료로 애용했습니다. 물론 그 결과가 항상 원래 목적이던 갈증의 해소에 충실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와인 애호가들이라면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겁니다.
3대 국제영화제 중 하나가 열리는 도시 칸(Cannes), 지중해의 휴양지를 거론할 때 빼놓지 않는 니스(Nice), 세계인이 사랑하는 화가 반 고흐의 흔적이 가득한 아를(Arles)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휴양 도시들이 몰려 있습니다.
이 때문에 프로방스 지방은 오래 전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혔고, 바캉스철이면 피서 혹은 휴양을 위해 이을 찾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당연히 이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관광 산업도 발달합니다.
근대와 현대를 거치면서 프로방스는 단지 프랑스인만이 아닌, 서구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워너비 휴양지로 발돋움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방문한 그들의 입소문을 타고 그 지역의 와인이 시장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바로 로제 와인인데요. 특히 로제는 화이트 와인의 레몬·자몽 등 시트러스류 새콤한 뉘앙스와 일부 레드 와인이 보여주는 딸기와 크랜베리 등 붉은 과실류의 상큼함을 함께 지녀 여름에 제격입니다.
로제의 생산과 소비는 기원전 600년께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물론 당시의 로제는 지금의 로제와는 달랐습니다.
오늘날 로제는 나름 특색을 가진 완성된 형태의 와인 종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냥 단순히 레드 와인에 물을 부어서 만들었습니다. 얼음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레드 와인을 비교적 차가운 식수로 희석한 셈입니다.
또한 로제 와인은 그 자체로도 식수 대용이었습니다. 정수를 구하기 어려웠던 당시의 위생 수준에서 로마군의 포스카(Poska)처럼 식수 대신 레드 와인에 물을 타 희석 후 음용한 것이죠.
실제로 당시 로마군은 레드 와인에 물과 허브를 추가한 포스카를 평시 1리터, 전시에는 3리터까지 배급했습니다. 이를 통해 먼 원정길, 낯선 곳에서의 이질이나 물갈이 등을 방비할 수 있었습니다.
로제 와인은 교황청이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 세워져있던 14세기 아비뇽 유수 시절, 이 지역이 크게 번성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아비뇽과 주요 로제 와인 산지가 시작되는 마르세유까지는 불과 100㎞ 정도로 가깝습니다.
당대 세계 최고의 권력자 주변에 귀족과 상인이 모이는 것은 당연했고, 그들이 자연스레 그 지역 와인을 마시게 되면서 로제가 인기를 끈 것 입니다. 물론 인기는 아비뇽에서 자체적으로 CDP(샤또네프뒤파프·교황의 와인, 과거 와인프릭 참고)를 생산하고, 교황의 유수 시기가 끝나면서 함께 저물게 됩니다.
이후 로제는 꾸준히 생산됐지만, 와인의 세계에서 주류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18세기 보르도 지역에서 클라레를 생산하던 게 그나마 역사에 등장하는 로제의 기록입니다.
되레 다른 지역에서 레드를 만들고 남은 부산물로 로제를 만들어 판매하면서 로제의 이미지 자체가 크게 추락하고 선호도 역시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실제로 국제포도와와인기구(OIV)에 따르면, 와인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프랑스에서 판매되는 와인 3병 중 1병이 로제일 정도로 이미 대중화가 이뤄졌습니다.(프랑스 내 판매 기준, 수출 물량은 다를 수 있음) 프로방스 지역 와인 생산자 및 상인의 조합(CIVP·Conseil Interprofessionnel des Vins de Provence) 역시 프로방스 지역 로제 수출량이 15년 새 500%나 성장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CIVP는 현대의 로제와 인기에 대해 “과거에 비해 덜 구조화된 식사, 쉽게 접할 수 있는 세계 각국의 요리, 단순하고 직접적인 와인,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관심, 무엇보다도 유쾌함에 대한 열망과 즉각적인 향유 등 로제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와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비단 프랑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국 와인 시장 역시 로제 와인의 비중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고, 이런 추세는 다른 국가로도 번지고 있습니다. 레드 와인에서 화이트, 샴페인으로 이동했던 트렌드가 이제는 로제로 옮겨가는 모습입니다.
‘레드와 화이트를 섞었다’던가, ‘레드를 만들고 남은 부산물을 재활용한 B급 와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1병에 3만원하는 레드 와인은 사더라도 같은 가격의 로제 와인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인데요. 최근 세계 트렌드의 변화에 따라 우리나라에도 추천할만한 로제 와인들이 수입되고 있습니다.
4대, 112년에 걸쳐 프로방스에서 로제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도멘 오뜨(Domain Ott)는 이 지역 수많은 로제 와인 생산자들 중에서도 가장 근본으로 손꼽힙니다. 프로방스 지역에서 가장 핵심 지역인 방돌(Bandol)이 지리적 원산지 표기법(AOC)에 따라 보호된 1941년보다도 한참 앞선 1912년부터 이 지역에 자리를 잡고 로제 와인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가장 먼저 현대식 로제 와인의 특색 중 하나인 맑고 투명한 색깔(Pale color)의 로제 와인을 만들어 판 장본인입니다. 그 장인 정신을 기려 ‘프로방스의 롤스로이스’라는 별명이 붙었죠.
무엇보다 생산 후 1~2년 안에 마셔야 한다는 로제 와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 장기숙성이 가능한 스타일의 도멘 오뜨 로제 샤또 로마상(Domaines Ott Rose, Chateau Romassan)과 로제와인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에뚜알 로제(Etoile Rose)는 와인 애호가라면 ‘제대로 된 로제 와인’이 무엇인지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경험해보시길 추천합니다.
아마도 브래드 피트는 미국 내 와인 트렌드를 읽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무렵 프로방스 지역의 로제 인기가 미국으로 넘어가 본격적으로 불 붙기 시작하던 시기였으니까요.
브래드 피트는 스스로 로제의 블렌딩부터 레이블과 병의 디자인에 모두 참여했습니다. 양조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남의 도움을 받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프로방스에서 북쪽으로 차를 1~2시간만 달리면 나오는 또 다른 유명 와인 산지 론(Rhone) 지역 전통의 생산자 페랑 가문(Famille Perrin)에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현재 5대째인 마크 페랑(Marc Perrin)이 이끌고 있는 페랑 가문은 그 유명한 샤토 드 보카스텔(Chateau de Beaucastel)을 소유하고 있는 명가입니다. 10개가 넘는 품종을 섞어 만든 와인, CDP를 주로 생산하는 가문답게 블렌딩과 세니에(Saignee·압착으로 나온 주스와 포도 껍질을 접촉시켜 색상을 뽑아내는 방식) 기술에 큰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파미유 페랑과의 협력으로 브래드 피트는 와이너리 구입 4년여 만에 처음 세상에 자신의 로제를 선보였고, 다행히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게 단순히 브래드 피트의 인지도 때문은 아니었던 게,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90점을 받으며 품질도 어느 정도 인정 받았습니다.
이렇게 뭉친 3P(피트, 페랑, 페테르)는 5년여 동안 제품 출시를 미루고 연구를 거듭합니다. 그동안 출시하지 않은 이유는, 이들이 이미 각자의 위치에서 확고한 자신의 입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버는 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기보다 제대로 된 완벽한 로제 샴페인을 출시하고 싶었던거죠.
결국 이들은 기존 샹파뉴 지역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방식의 로제 샴페인을 만들어냅니다. 남부에서 활용되는 세니에 방식으로 로제 와인의 베이스를 만들고, 만들어진 와인을 한데 모은 후 탱크에서 숙성과 병입을 다시하는 등 비효율적이고 기상천외한 방식들이 동원됐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이 바로 플뢰르 드 미라발(Fleur de Miraval) 입니다. 플뢰르 드 미라발은 지난해 3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공식 샴페인으로 등장했고, 현재는 병당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초고가 샴페인 플뢰르 드 미라발의 보급형인 쁘띠 미라발(Petit miraval)도 출시됐습니다.
거기에 그동안 철저하게 비주류였던 로제 와인이라면 아마 왠만한 와인 애호가라하더라도 더 접근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의 흐름이 로제로 넘어왔습니다. 실제로 해외 주요 와인 소비국에서 와인샵을 방문해보면 많게는 절반 가까이 상당히 많은 면적을 로제 와인 진열에 할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직 로제를 접해보지 않으셨다면, 역대급 무더위가 찾아오는 올 여름을 기회삼아 로제 와인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when it’s HOT, why NOT a LOT of domaines OTT”(크리스토프 코폴라 리나드, 도멘 오뜨 클로벌 앰버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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