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이동일의 인사이드 K컬처...'호랑이는 살아있다'-①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이에 연합뉴스 K컬처 팀은 독자 제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 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동일 연출가(연극학박사). 단국대 교수, 현 서강대 초빙교수.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과 '밀레니엄 프로젝트, DMZ 2000: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 연출, 덴마크 합작 프로젝트 '전쟁 후에(After war)' 등 총체극과 통섭형 작품 다수 연출.
우리는 아직도 전쟁 중이다.
잠시 전쟁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아름답게 나는 재두루미를 향해
서로를 겨누는 대공포가 숨겨져 있고
순박한 눈망울로 이를 바라보며 노니는
노루의 발밑으론 지뢰가 깔려져 있다
그리고 이백사십만의 원혼들과 천만의 피붙이들이
서로를 그리워하며
그 휴전선 철조망을 바라만 보고 있다.
눈물겨운 그리움의 시간은 무심히 흘러만 가고 있다.
미사일과 풍선이 부조리극처럼 날아다녀도 무심한 시간을 사는 지금 지난 1999년 12월31일 비무장지대의 철조망 안에서 시작하여 2000년 1월1일 임진각에서 공연된 '밀레니엄 프로젝트, DMZ 2000: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를 다시 생각해본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뢰가 매설돼 있는 비무장지대는 생태계의 보고(寶庫)가 되고 있다는 역설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밀레니엄 프로젝트 DMZ 2000: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선생이 예술고문으로 참여하고 필자가 예술 총감독을 맡아서 PBS, BBC, MBC 등 세계 87개국 방송사가 72시간 위성 생중계로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방송됐던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였다. 당시 동양을 상징하는 '월금'과 서양을 상징하는 '첼로' 형상의 백 선생 작품은 필자가 기증해 현재 세종문화회관 로비에 전시돼 있다.
당시 인터뷰를 보면 백남준 선생은 이 프로젝트의 기획 의도를 '무엇보다도 통일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자연스럽게 인식하도록 하자는 것에 있었다.
"'호랑이는 살아있다'는 82년부터 시작된 내 비디오아트의 총정리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45분짜리 비디오 작품을 보여주는데 이중 14분을 추려 한국의 MBC와 영국의 BBC, 미국의 ABC 등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방영하게 된다....예술을 통해 우리의 염원인 통일을 기원하는 것 자체가 너무 뿌듯하다. 전 세계를 향해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띄울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중앙일보 인터뷰, 1999.12.25일자)
약 30여년전 필자는 뉴욕에서 백남준 선생을 처음 만나서 다가오는 21세기의 예술과 기술의 발전과 소통에 관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작품 제작을 제안드렸다. 이후 "Shamanism and Information Super-highway'라는 기획안과 본인의 박사논문을 가지고 선생님의 자택으로 다시 찾아갔다.
가장 오래된 인류의 의사소통 수단이었던 굿과 새로운 시대를 이끌 인터넷과 비디오 아트를 접목하는 아이디어였다. 경주에서 출발해 이탈리아의 구겐하임 미술관까지 기차로 이동하며 현지 예술인들과 공연을 진행하는 장소 특정형 다문화공연(Immersive Intercultural Performance) 형태의 기획안이었다.
국가, 지역, 인종의 경계를 넘어선 공연을 인터넷과 위성방송을 통해 백남준 작품의 핵심적인 철학인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쌍방향 의사소통'(Participatoly democratic two-way communication)을 실현해 내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공연은 당시 미국에서 저명한 미디어 아트 평론가이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죤 헨하르트 수석 큐레이터의 도움으로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백 선생도 지대한 관심과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고 필자는 한국의 전통예술에 관한 영상자료와 참고서적을 선생님께 전해 드리고 기획을 구체화하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필자는 당시 한국의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준비상태가 타국에 비해 소홀히 진행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기존 기획안을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과 DMZ에서 제작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그리고 세계적인 각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한국 전통예술의 틀거리 안에서 새로운 장르의 다매체 다문화 공연(Multimedia Intercultural Performance)을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밀레니엄 프로젝트로 공연하는 내용으로 수정했다.
1999년 2월 중순 마이애미에서 휴양 중이시던 백남준 선생을 찾아가 사흘 동안 "백남준의 밀레니엄 비디오 씻김(가칭)" 기획안을 협의했다. 선생님 자택 팩스에는 끊임없이 밀레니엄 프로젝트 관련 제안서들이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첫 미팅은 중풍을 겪으시고 휠체어에 앉아 계신 선생님의 건강상태를 고려해서 30분 정도로 짧게 해 달라는 부인 구보다 여사의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선생님 혹시 한반도에 전쟁으로 인한 이산가족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아십니까?'라는 첫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여쭸다.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시던 선생님은 모르시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으셨고 내가 약 1천만명이라고 말씀드리자 많이 놀라셨다. 이후 분단과 이산가족의 아픔들을 담은 시들을 직접 읽어 드리며 선생님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밀레니엄을 축제로 준비하는 타국들과는 달리 인터넷도 뚫지 못하던 분단을 상징하는 비무장지대를 상생의 평화공간으로 만들자는 진지한 기획 의도를 역설했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 한국에서 경험했던 굿판의 엑스터시 상태의 춤을 기억해 내셨고 국경이라는 경계와 인종이라는 차이를 넘어서 가로지르는 비언어적인 춤과 음악의 소통의 힘을 이야기하셨다.
말을 타고 대륙을 가로지르며 자연과 상생할 줄 알았던 기마민족의 지혜와 위성을 통해 전 세계와 소통하는 위성아트의 가능성을 역설하셨다. 병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은 비무장지대 안에 문명의 쓰레기를 상징하는 폐차 2천여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서 생명과 상생을 상징하는 2천명의 남녀들을 춤추게 하는 'LIBIDO 2000'이라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시는 등 대화는 두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본인을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춤추게 하는 광대'라고 이야기하시며 유쾌하게 웃으셨다. 예술적 영감이 충만해지신 선생님은 호랑이처럼 힘이 솟아난다고 하시며 당장 해변으로 달려 나가 휠체어를 탄 당신과 당시 목발을 하고 계셨던 진영선 작가님과 달리기를 하자고 제안하실 정도로 즐거워하셨다.
'호랑이는 살아있다'라는 공연이 시작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전 세계를 떠돌며 포효하시던 상처 입은 호랑이 백남준이 고향으로 돌아오시는 길을 여는 순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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