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니 두 브랜드, 형제였네”…브로맨스 뽐냈던 ‘두 남자’ 나치 때문에 갈라섰다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4. 6. 2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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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58][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48]아돌프 다슬러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은 이름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창업자의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100년전 탄생한 나이키의 영원한 라이벌
1920년대 독일의 작은 마을 헤르초게나우라흐.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짙게 남아 있는 이곳에서 한 젊은 신발 장인이 낡은 재봉틀과 몇 가지 도구들로 하나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는 혁신적인 운동화를 만드는 것. 그의 노력은 운동화 브랜드 창업으로 이어졌고 1936년 자국인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그가 만든 스파이크 슈즈를 신은 미국 육상선수 제시 오언스가 금메달 4개를 차지하며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의 신발은 단순한 운동화가 아닌 경기력을 향상하는 혁신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순간이었습니다. 오늘의 브랜드로 남은 위대한 창업자는 여전히 나이키의 가장 큰 라이벌이자 독일을 대표하는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를 창업한 아돌프 다슬러입니다.

아돌프 다슬러
수제화 장인 아들의 거스를 수 없는 숙명
어린 아돌프 다슬러는 1900년 11월 3일, 독일 바이에른 주의 작은 마을 헤르초게나우라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신발 공장의 봉제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세탁소를 운영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는 섬유를 가공하고 신발을 세탁하고 재단하는 일을 가까이서 지켜봤습니다. 특히 그의 아버지 크리스토프 다슬러는 수제화 장인으로, 신발을 만드는 기술에 정통했습니다. 당시 독일의 신발 산업은 내림세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버지는 아돌프가 제빵사가 되길 바랬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청년 시절 아돌프 다슬러
아돌프의 별명은 아디(Adi)였습니다. 아디는 운동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학교에서도 항상 축구와 육상 등 다양한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며 뛰어난 운동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운동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성취감을 사랑했고, 이는 그가 나중에 스포츠용 신발을 만드는 데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항상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신발을 만드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디는 매우 창의적이고 손재주가 뛰어난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신발 공장에서 다양한 도구와 재료를 가지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신발 제작 기술을 익혀갔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아디는 공장으로 달려가 아버지를 도와 신발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신발 제작의 기초를 배웠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디에겐 둘도 없는 단짝인 형 루돌프가 있었습니다. 그와 루돌프는 매우 가까웠습니다. 두 형제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활동을 즐겼습니다. 루돌프는 아디의 아이디어와 열정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든든한 형이었습니다.

루돌프 다슬러
아디는 단순히 신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신발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는 자주 친구들과 함께 운동을 하며 직접 만든 신발을 테스트했습니다. 어떤 신발이 더 편안하고, 어떤 신발이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는지 끊임없이 연구했습니다. 이러한 노력과 열정은 나중에 그가 운동화 제작 분야에서 혁신을 일으키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세탁소 뒷편에서 탄생한 운동화 혁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0년대 초, 20대 청년 아돌프 다슬러는 어머니의 세탁실에서 운동화 제작에 몰두합니다. 쉽게 닳아버리지 않는 내구성이 강하면서도 운동 퍼포먼스를 향상할 수 있는 기능성 운동화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924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집에 돌아온 루돌프 다슬러는 동생의 신발 사업에 동참합니다. 그렇게 1924년에 그의 형 루돌프 다슬러와 함께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Gebruder Dassler Schuhfabrik)’을 설립했습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다슬러 가족을 포함한 12명의 직원들이 매일 50켤레의 운동화를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생산해냈습니다. 또한 외향적인 성격의 루돌프는 세일즈와 마케팅에 집중했고 조용하고 꼼꼼한 신발 장인 아돌프는 신발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초창기 다슬러 형제의 신발공장
아돌프는 언제나 운동화 제작에 있어서 완벽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보다 더 가벼운 신발을 만들기 위해 저울을 들고 다니며 다양한 원단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선수들과 트레이너들을 직접 만나 자신이 만든 신발의 성능을 테스트하고 피드백을 받아 개선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는 딱딱한 가죽 대신 부드럽고 가벼운 고무 원단을 사용한 운동화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 고무 운동화는 이후 아디다스 운동화의 원형이 됩니다.

특히 가장 좋은 제품을 만들어 제공하겠다는 그의 신조(Only The Best For The Athlete)는 아디다스 브랜드 철학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창업 이듬해인 1925년, 아돌프는 스파이크를 박은 러닝화와 가죽 징을 박은 축구화를 개발합니다. 이를 통해 아돌프는 특허권을 획득합니다.

특허 받은 혁신 운동화, 올림픽 금메달을 휩쓸다
이 신발들은 트랙과 필드에서 곧바로 좋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리나 라드케 선수가 해당 스파이크 운동화를 신고 여자 800m 달리기에서 세계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이어1932년 LA 올림픽에서 아서 요나스가 이 신발을 신고 육상 100m에서 동메달을 따면서 다슬러 형제가 만든 신발은 우연이 아닌 실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은 이들에게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이미 독일 국가대표 선수 대부분이 이들 형제가 만든 운동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글로벌 브랜드로의 도약을 꿈꾸던 이들 형제는 미국 국가대표가 머물던 베를린의 선수촌으로 향했습니다.

바로 미국의 육상스타 제시 오언스에게 자신들의 운동화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이에른 지역에서 베를린까지 10시간 가까이 직접 운전해 간 그들은 스파이크 운동화를 그의 발에 신기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제시 오언스는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계주, 멀리뛰기 등 총 4개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며 베를린 올림픽 최고의 스타에 등극합니다. 바로 아돌프의 신발을 신고 말이죠.

다슬러 형제의 신발을 신고 금메달 4개를 딴 제시 오언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까지 다슬러 형제는 매년 20만 켤레 이상의 운동화를 판매합니다.
나치로 시작된 형제의 비극이 만든 반전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발생합니다. 동생 아돌프와 형 루돌프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애당초 아디와 루돌프는 앞서 언급한 대로 성격이 매우 달랐습니다. 아디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인 반면, 루돌프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마케팅과 영업에 강점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성격 차이가 업무 스타일에서도 항상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형제는 1933년 나치 당원이 됩니다. 문제는 사업에 도움을 받을 것이란 기대감에 가입한 아돌프와 달리 루돌프는 진성 나치 당원이었다는 점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또다시 징집된 루돌프로 인해 아돌프는 혼자서 사업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 루돌프는 아돌프가 자신을 음해하고 고발했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실제 전쟁이 끝난 후 전범재판 등을 놓고 두 형제는 서로를 탓하며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그렇게 스포츠업계를 주름잡던 두 형제의 갈등은 완전한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를 키웠지만 반대로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 두 곳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바로 동생 아돌프가 지켜온 기존 회사는 아디다스가, 루돌프가 독립해 새로 세운 브랜드는 푸마가 됩니다.

아돌프(사진 왼쪽)과 루돌프 형제
1949년 새롭게 만든 아디다스라는 브랜드는 아돌프의 별명 아디(Adi)와 성인 다슬러(Dassler)를 조합해 만든 것입니다. 루돌프는 처음 ‘루다(Ruda)’라는 브랜드를 만들었지만 곧 ’푸마(Puma)‘로 변경하며 큰 성공으로 이어집니다.

두형제의 갈등이 오히려 업체간 경쟁을 유도하고 소비자들의 선택지를 넓히는 기회로 이어진 것이죠. 물론 반대로 두 형제가 계속해 힘을 합쳤으면 나이키를 뛰어넘는 대제국을 형성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슬러 형제의 결별은 스포츠 용품 업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두 형제가 각자 설립한 아디다스와 푸마는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로서 경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경쟁은 혁신과 품질 향상을 촉진했고, 전 세계 스포츠 애호가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아디다스와 푸마는 각각의 브랜드로 독립하며, 스포츠 용품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다슬러 형제의 갈등과 결별은 한편으로는 슬픈 이야기이지만, 결과적으로 두 개의 위대한 브랜드가 탄생하게 만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아돌프 다슬러 동상
영원히 남을 철학 ‘최고의 제품을 선수에게’
1960년대까지 축구와 육상 등 스포츠 분야 전반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보이던 아디다스는 1970년대, 필 나이트가 창업한 나이키와 치열한 경쟁에 직면합니다. 나이키의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과 혁신적인 제품 출시로 인해 아디다스는 시장 점유율을 잃기 시작했고 1989년에는 아돌프 다슬러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가 사망하면서 오너경영체제도 막을 내립니다. 이후 여러 차례 위기와 실패를 통해 아디다스는 변화했고 최근엔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며 또다른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아돌프 다슬러는 197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아디다스에 남아있습니다. 혁신과 품질에 대한 그의 열정은 아디다스를 세계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돌프 ‘아디’ 다슬러의 작은 세탁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제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거대한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생산 공장에서 기념촬영하는 아돌프 다슬러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중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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