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쳐짐의 미학을 발견하다
비가 내리는 주말임에도 대구에서 머무는 도반이 경기 양주 회암사 사리를 친견하고자 일부러 시간을 쪼개서 올라왔다는 문자를 보냈다. 회암사박물관 출입문을 찍은 인증샷도 함께 전송했다. 멀리서 찾아올 만큼 회암사 터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넓은 부지에 남아있는 주춧돌과 석축 그리고 돌계단이 어우러진 공간은 폐허지가 주는 허허로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그 무상한 아름다움으로 1년에 수만명의 답사객을 부르는 지역사회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최근에는 이런저런 일로 두 번을 다녀왔다. ‘겹쳐짐의 미학’을 정리할 수 있는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첫째, 궁궐과 사찰이 겹쳐진 모습을 만났다. 태조 이성계(1335~1408)와 무학대사가 함께 머문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제일의 규모였다고 한다. 조선왕실의 원찰(願刹)인 동시에 행궁(行宮) 역할을 했던 까닭이다.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이 “당우가 엄청나게 크고 아름답고 화려하기가 동국의 제일이니 중국에서도 비견할만한 사찰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사찰인 동시에 궁궐이요 궁궐인 동시에 사찰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비록 폐사지가 되었지만 지금 남아있는 흔적만으로도 본래의 화려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둘째,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겹쳐진 곳이다. 그 곳에는 불교를 숭상한 고려왕실와 유교를 국시(國是)로 한 조선왕조가 힘겨루기를 한 현장이기도 하다. 고려 공민왕 이후로 조선 초기까지 불교계의 중심인물인 지공선현(指空禪賢)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376) 스님께서 활동하던 근거지였다. 회암사지(址)를 옆으로 끼고서 포장도로를 따라 천보산 방향으로 올라가면 새로 지은 회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절 마당 동편으로 언덕같은 느낌을 주는 산등성이를 따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각각 독립된 당당한 모습의 삼화상 부도 3개가 그 시절을 대변하고 있다.
청사초롱 등(燈)에는 ‘삼화상 수행성지’라는 글자를 새겼다. 삼화상은 현재까지도 절집에서는 신통한 영험을 가진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회암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에서 삼화상의 진영을 모시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정조 때 ‘삼화상 교서(敎書)’가 내려져 국가적 차원에서 추모행사가 이루어지면서 명실상부한 나라의 스승으로 자리매김 했다. 영정이 없는 사찰에서는 삼화상의 이름을 적은 놓은 문자불(文字佛)로써 진영을 대신할 만큼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셋째, 삼화상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지공선사는 중국과 인도가 겹쳐지는 인물이다. 석가족의 혈통을 물려받았으며 당시 인도불교의 중심인 나란다(那爛陀)대학에서 수학했다. 북인도 전역을 돌면서 수행한 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元)에 들어가 활동했다. 1326년(충숙왕13)부터 3년간 고려에 와서 금강산·개성·인천·양산 통도사 등을 돌며 교화를 펼쳤다. ‘달마대사의 화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려 사람들의 흠모를 받았으며 나옹·무학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넷째, 지공선사는 고승인 동시에 풍수의 대가라는 이미지가 겹쳐지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회암사 터를 점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 나옹에게 ‘삼산양수(三山兩水)’라는 수기(受記, 예언)를 내렸다. 삼산과 양수가 합친 중간지점에 마치 인도의 나란타사(寺)와 같은 터가 있으니 그곳을 찾아 사찰을 지으라고 한 것이다. 삼산은 삼각산(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이며 이수는 한강과 장단강을 말한다는 해설이 뒤따랐다. 양주 회암사의 위치는 가깝게는 삼각산을 마주보면서 남쪽에는 한강이 있고 북쪽에는 장단강(長湍江)이 있는 곳이다. 삼산양수의 수기(三山兩水之記)에 딱 부합하는 터라고 하겠다. 인도의 나란타는 당신이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양주 천보산 산세가 나란다 대학이 자리잡은 곳과 비슷하다는 설명이 자연스럽게 추가되었다.
다섯째, 회암사 경내에 있는 사리탑에는 한국과 미국이 겹쳐졌다. 그 사리는 일백여년 전 일제강점기 때 해외로 반출되었고 손바꿈을 통해 1939년 이후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서 소장했다. 사리의 존재가 2004년 처음 알려졌고 2009년부터 반환논의가 시작된 후 많은 이의 땀과 노력이 합해지면서 2024년 5월 드디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를 했다. 그리고 회암사박물관에서 일반인도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봉안 이후에는 태평양 너머 미국까지 겹쳐지는 글로벌 사리탑이 될 것이다.
회암사 옛터에서 여말선초 삼화상으로 불리는 고승을 동시에 만났다. 또 풍수지리 전문가로써 안목까지 발휘된 곳이다. 궁궐과 사찰이 겹쳐진 건축물 위에서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중첩된 시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인도와 중국 그리고 미국까지 관계된 공간임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많은 옛인연들이 겹겹으로 쌓여있는 터에 다시 새로운 시절인연들이 하나하나 더해지고 있었다.
원철 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채 상병 특검법’ 법사위 통과…7월19일 이전 본회의 처리 방침
- 서울 첫 열대야, 역대 가장 일렀다…남부 장마 시작
- 윤 대통령 격노 여부에 “안보 사항, 답변 불가”라는 전직 비서관
-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감정 다스리는 세가지 방법
- 옹이 없는 목재 찾아 제주 삼만리…‘원목 돔베’ 탄생기
- 윤 격노설 부인하던 김계환, 청문회선 “증언 거부” [영상]
- 넉달 넘긴 의료공백에…환자단체들, 대규모 집회 연다
- 성폭행범 때려잡은 ‘공포의 검은띠’ 가족…미국인들 “태권도 최고”
- 숲에 갈래 바다 갈래…울진에 갈래, 오지마을은 덤
- 한동훈·나경원·원희룡·윤상현 4파전…결선투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