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첫 여성 총리, 멜로니가 연 극우의 시대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정치인에 대해 글 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정치인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글을 쓴다. 다른 직업군보다 지나칠 정도로 조명을 더 받는다. 사진 고르는 것도 재미가 없다. 정치인 사진이라는 게 특별한 게 별로 없다. 지루한 양복을 입고 이빨이 다 드러나는 억지웃음을 짓는 홍보용 사진이 전부다. 나는 특정 정치인 때문에 특정 정당 당원이었던 적도 없다. 아무래도 정치인에게 끌리는 타입은 아닌 것이다.
유럽이 난민을 받아들일 때부터
정치인에게 끌릴 때도 가끔은 있다. 보통의 정치인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정치인 말이다. 보통의 정치인은 대개 중년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세계 어디를 가든 비슷하다. 다만 보통의 정치인 얼굴에서 어딘가 비켜나가는 정치인이 등장하는 순간들이 있다. 소수자의 얼굴을 가진 정치인들이다. 이를테면 나는 리시 수낵이 영국 총리가 됐을 때를 기억한다. 세상은 그가 첫 이민자 출신 영국 총리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의 피부색이 이미 뭔가를 바꾸어낸 것처럼 떠들썩했다.
나는 영국에 잠깐 살았던 적이 있다. 20년도 더 된 일이다. 여전히 페이스북으로 연결된 그 시절 친구들은 하나같이 노동당 지지자들이다. 한국 언론이 ‘최초 유색인 총리'에 들떠 있는 동안, 내 페이스북은 저주의 게시물로 넘쳐났다. 영국 친구들 게시물이었다. 그들은 세상 돌아가는 꼴도 모르는 영국 최고 갑부 중 하나가 총리가 됐다며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영국이 인종차별이 없는 국가는 아닐 것이다. 미국처럼 시스템화된 인종차별이 있는 나라는 아니다.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일 만큼의 차별이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하여튼 인종차별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미국과 영국은 오묘하게 좀 다른 데가 있다.
오히려 영국의 차별은 ‘계급'에서 나온다. 한국이나 미국과는 조금 다르다. 영국은 보이지 않게 여러 층위로 나눠진 계급의 나라다. 리시 수낵은 피부색과 관계없이 이미 계급의 정점에 서 있던 남자다. 대영제국 훈장 수훈자 할아버지를 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금수저다. 그는 영국 사회 상류층 자제들이 가는 학교들을 거쳤다. 부인은 인도의 빌 게이츠라 불리는 억만장자 나라야나 무르티의 딸이다. 총리 부부 재산을 모두 합하면 찰스 3세 국왕보다 많다. 그러니까 한국 언론들이 ‘최초 유색인 영국 총리’를 외치고 있을 때 영국인들의 마음은 어땠겠는가. 물론 리시 수낵은 총리가 된 이후 노동당 지지자들이 가장 미워하고 가장 잘 놀려먹는 인물이 됐다. 일반 대중과 그의 괴리를 보여주는 밈이 한두개가 아니다. 21세기에 인종과 성별, 정체성 같은 것은 한 정치인의 어떠한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리시 수낵 정도는 세상 물정 잘 모를 뿐 어쨌든 품위는 있는 보수주의자 아니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럴 수도 있겠다. 그나마 영국이라는 나라는 극우 세력이 준동할 만큼 민주주의가 나약한 국가는 아니니까 말이다. 아니다. 그 나라에도 브렉시트 운동을 주도했던 영국독립당 나이절 패라지 같은 인간이 있다. 그 세력도 점점 힘을 모으는 중이다. 물론 유럽 대륙처럼 끔찍한 지경은 아니다. 얼마 전 유럽연합(EU) 내 극우 양대 정당이 유럽의회 선거에서 4, 5위에 올랐다. 유럽연합의 두 엔진인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집권당이 극우 정당에 패배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실 우리 모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유럽이 중동으로부터 난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극우는 조만간 자신들의 시대가 올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이 떠난 유럽에
인종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성별 역시 그럴 것이다. 영국이 ‘최초 유색인 총리'를 선출하기 몇년 전 이탈리아는 ‘최초 여성 총리'를 맞이했다. 조르자 멜로니다. 한국은 이탈리아 정치에 별 관심이 없으므로 뉴스에도 자주 나오지 않던 인물이다. 재미있게도 그는 여성인 동시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극우 정당 ‘이탈리아의 형제들’ 당수다. 19살 때 인터뷰에서 “나는 무솔리니를 존경한다”고 했던 양반이다. 나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아니다. 밀라노에 출장 가 오래된 이탈리아 친구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면 가능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 친구는 정치 이야기를 하던 중 “남부는 이탈리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가난한 그 동네가 자신처럼 열심히 일하는 북부인들의 세금을 모조리 가져가고 있다는 불평이었다. 이걸 한국식으로 바꾸자면 “전라도는 한국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 친구도 조르자 멜로니를 지지했을 것이다. 나는 정치 성향으로 친구를 구분하는 인간은 아니므로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다.
조르자 멜로니의 과거로부터 극우가 된 비밀을 캐내는 건 가능한 일일까? 그는 1977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르데냐 출신, 어머니는 시칠리아 출신이다. 부모가 모두 남부의 가난한 섬 출신이라는 것이 그의 정치적 성향을 만든 것일까? 어쨌든 멜로니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가 하고 싶었다. 1992년 겨우 열다섯 나이로 ‘이탈리아사회운동’이라는 청년 정치단체에 가입했다. 1995년에는 전국 학생운동 대표가 됐다. 출세는 빨랐다. 조르자 멜로니는 2008년 겨우 서른한살 나이에 베를루스코니 내각 청소년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 최연소 장관이라는 놀라운 타이틀이었다. 모든 것은 2022년 정점을 찍었다. 2022년 총선에서 조르자 멜로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형제들’은 이탈리아 민주당을 꺾고 1당에 올랐다. 그는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자신의 극우정당을 압승시키고 이탈리아의 리더가 된 것이다.
조르자 멜로니가 이탈리아 최초 여성 총리가 되자 유럽은 신음했다. ‘여자 무솔리니’라는 별명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진정한 아이러니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총리가 됐는데도 기뻐할 수가 없다는 아이러니 말이다. 지난 10년 유럽 여성 정치인을 대표하는 얼굴이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었다면 앞으로의 10년을 대표하는 얼굴은 조르자 멜로니가 될 참이었다. 메르켈과는 정확하게 반대의 의미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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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역사에 불과하다”지만
모두의 걱정 때문이었을까. 조르자 멜로니는 고개를 숙였다. 총리가 되자 “파시즘은 역사에 불과하다”며 파시스트와 선을 그었다. 지난 2년간 멜로니는 우려와는 달리 유럽연합 정책을 지지했다. 이민자 문제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난민을 막기 위해 군대로 해상을 봉쇄하겠다”는 발언을 거침없이 하던 시절과는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조르자 멜로니는 ‘막상 권력을 쥐니 유해지는 정치인’의 또 다른 사례로 남을 것인가.
우리는 앞으로 조르자 멜로니라는 이름을 더 많이 듣게 될 것이다. 얼마 전 멜로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형제들’은 28.8% 득표율로 이탈리아 선거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탈리아의 형제들’이 속한 유럽의회 극우 그룹인 ‘유럽 보수와 개혁’도 의석수가 늘었다. 영국 경제 일간지인 파이낸셜타임스는 멜로니가 “유럽연합 내 킹메이커 역할을 할 것”이라고 썼다. 프랑스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 역시 프랑스와 유럽연합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두명의 여성 극우 정치인이 유럽의 정치 지형도를 완전히 바꾸고 있다. 혹시 조르자 멜로니는 무솔리니 숭배자의 과거를 벗고 온건한 보수주의자로서 유럽의 새로운 얼굴이 될 수 있을까? 글쎄다.
마지막으로 조르자 멜로니의 현란한 발언을 남기며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그는 “동성애자와 악수를 하든 토사물에 키스를 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토사물에 키스를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20년 하원의원 선거 때는 “이슬람 광신도와 테러리스트를 폭행하고 살해하는 시민에게 훈장을 수여할 것”이라고 했다. 2019년에는 한 인터뷰에서 “동성애자와 이슬람에 물든 이유(EU·유럽연합)는 실패했다. 우리는 탈퇴할 것”이라고 포효를 쏟았다. 겨우 몇년 전 했던 말이 혀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리는 없다. 조르자 멜로니의 극우 이탈리아는 유럽연합을 탈퇴하지 않았다. 대신 유럽연합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지금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이거다. 우리는 흉악한 남성의 얼굴을 한 파시즘의 시대를 잘 알고 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세계 말이다.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의 얼굴을 함께 한 극우의 시대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이것은 한번도 본 적 없는 극적인 우향우다. 우리는 어쩌면 약자와 소수자라는 것이 더는 정치적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 세계로 빠져들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조르자 멜로니는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그 세계의 새로운 얼굴이다.
문화평론가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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