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폭력 뒤엔 '나르시시즘'이 숨어있다

김창훈 칼럼니스트 2024. 6. 22.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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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견문록] <나르시스의 꿈>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후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순항할 것이라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대와 달리 불과 수십년만에 착취와 빈곤이 일상이 된 사회를 눈 앞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서 탈주하려는 국가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브릭스나 상하이협력기구 등으로 모이고 있다. 집단서방의 헤게모니는 왜 이렇게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이런 현상을 미국 경제의 퇴조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의 글로벌사우스가 미국적 질서를 추종하기를 거부하는 데에는 아마도 집단서방의 폭력성이 또 다른 요인이지 않을까? 글로벌사우스에게 서방은 '폭력'의 대명사였다. 서방은 폭력이 요구받지 않을 때조차도 서슴없이 폭력에 의존했다. 왜일까? 한국의 대표적 철학자 중 한 사람인 김상봉 전남대교수의 책 <나르시스의 꿈>(김상봉 지음, 한길사 펴냄)을 읽으며 "왜"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한다.

김상봉은 서방의 폭력성은 그들이 가진 사유의 원리로부터 연유한 것이라 말한다. 그는 이 원리를 '나르시시즘'라 말한다. 그리고 서양정신의 역사 전체를 '나르시스의 꿈'이라 부른다. "착취와 빈곤의 세계화"를 초래하고 세계적 분쟁과 자연파괴를 만든 것도 서양정신의 이런 특징 때문이었다. 김상봉은 서양정신의 전개과정을 '나르시스의 꿈'이라 말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그 까닭은 서양철학이 한번도 자기 밖으로 걸어나와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성찰한 적이 없는 닫힌 정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꿈의 파노라마이기 때문이다."(<나르시스의 꿈>에서 인용) 저자는 나르시스를 "타자적 주체를 알지 못하는 정신"이라 정의한다. 서양정신의 이런 특징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저자는 근원을 찾아 그리스까지 거슬러간다.

나르시시즘은 시적 정신으로부터 기원했다. 저자에 따르면 그리스철학의 출발은 호메로스였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노래하는 시가 어떻게 그리스철학의 시발점이 되었을까? 현대 고전연구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그리스철학의 특징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호메로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기원전 5세기 소피스트의 출현 이전까지 호메로스의 시는 그리스인들에게 거의 유일한 교과서였다. 호메로스의 시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삶을 규정하는 원칙적 가치와 규범을 배울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정치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문화적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철학과 종교가 정신문화를 이끌었다. 유독 그리스에서는 시인 호메로스로부터 그리스철학이 탄생했다. 이런 사실은 이후 서양철학의 독특성을 주조해내었다. 그 독특성이란 "그리스인들이 사물에 대한 객관적 진리나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확신보다 아름다움을 먼저 구했음"을 의미한다. 김상봉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문화의 근원적 관심은 진리나 선 이전에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심미적 정신으로부터 그리스의 철학이나 과학이 생겨났던 것이다." 세상 속에 던져진 인간은 심리적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의 원리를 추구한다. 그 원리가 제공하는 총체성이 마음의 불안을 진정시키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주역이라는 철학, 인도와 중동은 종교였고 그리스는 시였다.

김상봉은 "시문학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기반성의 산물이다. 자기자신에게 도취한 정신, 그것이 바로 시적 정신"이라 말한다. 시는 왜 본래적으로 자기정향적 반성이며 나르시시즘적인가? 시 자체가 인간의 삶과 연결되지 않고는 정립될 수가 없어서 그러하다. 삶과 매개되지 않은 그래서 주관적 감동을 결여한 표상은 단지 사물에 대한 개념적 표상일 따름이다. 호메로스의 시에서는 신조차 인간과 연결될 때에만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된다. "거기(호메로스 서사시-필자주)에서 그려지는 세계에는 신과 자연도 있다. 그러나 신은 언제나 인간의 삶에 연루되는 한에서만 무대 위에 등장한다. 더 나아가 신들의 삶은 철저히 인격적이다. 그런 한에서 신들의 묘사 역시 인간적 삶의 자기반성에 다름 아닌 것이다."

서사시는 결국 나르시시즘으로 이어진다. 김상봉의 이어지는 논지다. "서서시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세계의 지평은 인간의 삶이다. 모든 것은 삶의 지평 속에서만 존재하며 삶의 자기반성 속에서만 이해되고 해석된다. 그런 의미에서 서사시에서 세계해석과 존재이해의 근원적 지평은 삶과 정신의 자기반성이며 그것의 근원적 정조는 나르시시즘인 것이다." 서양의 나르시시즘은 주관주의로 귀결된다. 나르시시즘의 본질이 주관주의인 까닭이다. 나르시시즘은 초점을 자신에게 맞춘다. 세계 속 등장하는 타자성을 자기 반성 속에서 주관화하고 내재화시킴으로써 낯선 "타자성"을 극복하려한다. 이런 전개에서 주관주의는 필연이다. 호메로스 서사시는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으로 가득하다. 서사시 속에서 신들에 대한 숭배는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리스적 정신은 온전히 '미적 합리성'이다.

이런 정신에서는 동일성의 원리가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나르시시즘은 자기를 통해 타자를 이해하려 한다. 그것은 자기 아닌 것을 자기와 같은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이해하려한다." 동일성의 원리는 나와 완전히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낯선 타자는 나의 주관주의 필터를 거쳐 이해되어야만 할 존재인 것이다. 나르시스적 주관주의에 침윤된 미적 합리성은 '동일성의 원리'로 무장한다. 타자란 그 자체로 존립하지 않고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계기일 따름이다. 김상봉은 이렇게 단언한다. "나르시스적 존재이해는 존재를 근원적인 동일성과 통일성 속에서 파악하려 한다. 낯선 것,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것을 나르시스적인 존재이해는 견디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런 것들은 나르시스적 세계에서는 부정되고 배제된다."

섬세한 심미적 감성을 가진 채 자아도취해 있던 그들은 이웃들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서양 역사학의 비조로 불리는 헤로도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책 <역사>는 동지중해 연안지역에서 강대국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등장하는 그리스의 성공을 찬미하는 '장대한 서사시'였다. 실제 역사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페르시아전쟁은 국가들간의 합종연횡으로 전개된 물리적 폭력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이 전쟁을 물리적, 정치적 충돌이 아닌 문명과 문명의 충돌로 이해했다. 자유의 그리스가 지배와 예속의 오리엔트문명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보존했다고 본 것이다. 그의 논리는 서양적 사유에서 지배적 패러다임이 되었다. 문명대국 페르시아는 헤로도투스에게 마땅히 거부해야할 문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 이외는 모두 바르바로이 즉 '바르바로이'였다. 누군가를 야만인으로 정의하려면 스스로를 보편자로 인식해야한다. 스스로를 세상의 보편자로 바라보는 인식은 서양문명의 본질적 성격이 되었다.

그리스정신의 나르시시즘은 독일관념론에서 본질적으로 실현된다. 칸트철학에서 외부 대상은 자기 주관의 계기로 전락한다. 외적 세계는 나의 주관을 구성하는 요소이지 그 자체로 실체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특히 '자유'는 독일관념론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모든 인간은 그자체로서 자유롭다"는 헤겔의 말은 이를 의미한다. 주관주의와 자유로의 정향은 서양정신의 나르시시즘적 특징을 더욱 강화했다. 왜냐하면 나르시시즘의 본질이 "의식의 자기복귀"이기 때문이다. 외부로 향하지 않고 자기 내부로 자유롭게 침윤하는 정신이 나르시시즘인 것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한 독일관념론의 주관주의로 인해 서양정신의 나르시시즘은 더욱 강화되었다. 마침내 저자는 이렇게 단언한다. "독일관념론은 나 밖의 모든 타자를 제거하려 했다."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서구는 세계를 폭력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 폭력성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산과정에서만 찾는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 그들이 행한 폭력의 정도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정도의 폭력성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집착만으로는 발휘되기 어렵다. 그들의 폭력 뒤에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정신적 메커니즘이 있음에 틀림없다. 철학자 로크는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 원주민 땅 탈취를 철학적으로 옹호했다. "신은 사람들에게 세계를 공유물로 주었다. 그러나 신은 세계를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이익과 최대한의 편익을 위해서 주었으므로, 그것이 항상 공유로 그리고 개간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신의 의도라고 상정할 수는 없다."(로크 <통치론> 34절 강정인 번역 까치 펴냄) 개간되지 않은 아메리카의 땅에 대한 백인의 권리를 신의 이름으로 옹호한다.

근대 계몽기 최고의 철학자였던 칸트의 경우를 살펴보자.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에 의해 많은 조명을 받고 있다. 영구평화론은 미국의 정치학자 마이클 도일에 의해 민주평화론으로 변모했다. 칸트를 원용한 민주평화론은 어떤 사상이었을까? 정치학자 이혜정의 논문 <민주평화론의 패러독스>에서 민주평화론에 대한 평가다. "민주평화론은 냉전의 종언 이후 미국 패권의 지구적 확산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고 9.11테러 이후에는 테러의 근본원인을 미국이 체현하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부정으로 보는 부시정부에 의해 대테러전쟁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는 전략적 지침으로까지 설정되었다." 자칫 전쟁찬미로까지 오해될 수 있는 폭력이 결국 평화로 귀결된다는 칸트의 생각 '비사회성의 사회성'에 대해 김상봉은 자신의 논문 <법을 넘어서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 칸트 당대 전쟁의 개념으로 구축한 이론에 불과하다며 강하게 비판한다.

칸트가 제국주의를 대놓고 옹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칸트 사상의 특정 요소가 제국주의를 정당화한다고 박배형 서울대교수는 말한다. 그는 논문 <영원한 평화 그리고 제국주의>에서 "칸트는 '야만인들의 '무법적 자유'를 '경멸'하며 이를 '인간성의 조야함'으로 여기면서 그러한 '추락된 상태에서 서둘러 벗어나야'한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당대 유럽의 정치형태와 제도를 보편적 기준이자 모델로 설정한다. 야만인들을 어떻게 여기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라며 유럽을 절대적 보편자로 설정하는 칸트를 비판한다.

칸트라는 위대한 철학자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칸트조차 유럽지식인의 고질병인 '나르시시즘'을 탈피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칸트만일까? 기득권이 설계한 이데올로기의 매트릭스로부터 탈주할 것을 주장하는 철학자 지젝은 러-우전쟁이 발생하자마자 아무런 주저없이 러시아만을 맹렬히 비난했다. 글로벌사우스의 지식인들이 우크라이나를 미국의 대리인으로 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지젝조차 자신들이 얼마나 '유럽적 나르시시즘'에 중독되어 있는지를 의식하지 못한다. 김상봉이 말하듯 나르시시즘은 타자로부터 타자성을 제거하고 타자에게 자신을 강요하는 것이다. 칸트와 지젝은 결국 자신들의 무의식 안에 뿌리내린 나르시시즘을 충실히 따랐을 따름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행한 칸트도 기득권 체제가 설계한 이데올로기를 돌파하라는 지젝도 '나르시시즘 매트릭스'에 걸려넘어졌던 것이다.

유럽은 '나르시시즘'이란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다. 동일한 질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탁월한 치료제 <나르시스의 꿈>의 일독을 권한다.

▲ <나르시스의 꿈>(한길사 펴냄, 김상봉 지음) ⓒ한길사

[김창훈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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