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노든 피해자의 일상회복 고려하는 게 더 중요”
[주간경향] “이겨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잊지 않고 관심 가져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지난 6월 13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공개한 밀양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편지 속 내용이다. 사건이 알려진 지 이미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해당 편지 속 피해자는 ‘여전히 가끔 죽고 싶거나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멍하니 누워만 있을 때도 있다’고 일상을 설명했다. 그에게 지난 시간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상처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피해자의 편지는 지난 한 달, 밀양 성폭력 사건이 재공론화된 과정을 돌아보게 한다. 가해자를 처벌한다는 ‘미명’ 아래 사건은 다시 헤집어졌고, 피해자의 목소리까지 공개됐다.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의 동의는 없었다. 문제 제기가 있자 이번에는 “정의를 위한 것이니 피해자는 가만있어라, 협조하라”는 요구까지 나왔다. 어느 날 갑자기 20년 전 사건을 떠올린 이들이 20년을 고통받아온 이에게 던지는 충고, 비난은 대체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지난 6월 18일 밀양 사건 피해자를 지원해온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방문해 김혜정 소장을 만났다. 김 소장은 사건에 대한 사회적 분노부터 피해자가 받을지 모르는 상처까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말속에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를 다시 고통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근원적 물음이 담겨 있었다.
-밀양 성폭력 사건이 피해자 의사와 무관히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보나.
“우리는 피해자 말고도 생존자라는 용어를 쓴다. 피해 이후에도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역사적인 사건’의 피해자들도 마찬가지다. 살아남아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끔찍하다’고 여겨지는 사건들이 종종 영상으로 만들어진다. 기성 언론을 포함해 유튜버까지 과거 사건을 꺼내 콘텐츠로 만든다. 공익목적으로 제작되는 경우라도, 사건 당사자인 피해자들은 트라우마가 자극되고 일상 안정이 깨지게 된다. 묻고 싶다. 영상을 제작할 때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지 고민한 적 있나’, ‘자극적으로 조회수를 늘리는 데만 집중한 것은 아닌가’. 가해자를 고발하고 사건을 ‘끌올’해 정의를 구현하겠다면 그 영상으로 인해 피해자가 짊어져야 할 짐까지 함께 나눠질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어떤 ‘분노’든 피해자의 일상회복과 삶을 고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게 정의야’라고 말하기 전에 평등하게 연대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정의는 가능해진다.”
-유튜버가 ‘미뤄진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도, 기성 언론도 못 하는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대중적 분노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밀양 성폭력 사건 가해자 공개 과정을 보면 피해자와 가족들이 영상을 내려 달라고 호소해야 했고, 사실관계를 다퉈야 했고, 유튜버를 옹호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까지 받았다. 또 가해자 신상 공개를 하거나 판결문을 공개할 때는 피해자 동의가 있었거나 뜻인 것처럼 말했다. 적어도 공개한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 후 발생하는 문제의 책임은 피해자에게 귀결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가해자 폭로를 하는 대표적인 유튜버는 여전히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피해자의 일부 가족으로부터 공론화시키는 쪽이 맞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미 밝혔다. 왜 피해자 가족들과의 연락 중 일부만을 발췌해 소통이 끝났고, 모두 동의했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유튜버의 개인적 주장이 반영된 선택적 편집이다. 피해자는 동의한 바 없다. 이런 상황이 만드는 모순은 피해자들이 유튜브 계정 주인들과 ‘위험한 소통’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언제 영상을 내려줄지 몰라 계속 기다리고 전전긍긍하며 부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왜 피해자가 이들의 시혜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내몰려야 하나.”
-밀양 사건이 다시 주목받으니 ‘잘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피해자가 내일은 또 어느 방송, 유튜버가 사건을 공개할지 불안에 떨어야 하는 상황이 정말 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나. 이 사건을 둘러싼 여론을 보면 네 가지 스펙트럼이 있다. 우선 ‘피해자는 빠져라. 우리는 가해자를 나락 보내는 것이 목표다’라는 분들이다. 이들은 국민 알권리를 내세우며 피해자의 평온할 권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정반대로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공론화 영상을 보지 않겠다’는 분들이 있다. 이들 사이에는 ‘힘들다는 것은 알겠는데 피해자가 공론화에 나서 달라’고 요구하는 분들,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은 현실은 분노스럽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느냐’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 어떤 ‘분노’든 피해자의 일상회복과 삶을 고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게 정의야’라고 말하기 전에 평등하게 연대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정의는 가능해진다.”
-피해자 입장을 고려해 달라고 하면, ‘도와주려고 했더니 관심 끄겠다.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밀양 사건 피해자는 경찰 조사만 8~9번을 받았다.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 것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피해자의 용기 덕분이었다. 숨죽이고 아무것도 못 한 채 살아온 사람이 아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사람이란 것이다. 밀양 성폭력 사건이 ‘끌올’될 때마다 피해자는 2004년 열다섯 살 당시로 되돌아가야 한다. 동시에 완전히 무력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전형적 피해자로 묘사된다. 피해자의 주체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생존자와 같은 입장에서 상처를 극복할 수 있게 동료가 돼 달란 것이지, ‘너는 가만히 있어, 내 방식대로 해결해 줄게’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가해자를 응징해야 한다는 의견도 여전히 많다.
“가해자 신상 공개만이 미뤄진 정의를 바로잡는 것인가. 피해자가 우리 사회에서 잘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역시 ‘정의를 바로 잡는 것’이다. 또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피해자 의료, 법률, 주거 지원 예산확충 등 사람들의 관심, 노력이 필요한 곳이 많다. 이러한 부분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사적 제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나.
“밀양 사건 재점화 과정이 피해자가 답답하고 무력감을 느끼는 시간이 되면 안 된다. 그렇기에 피해자가 ‘내 뜻이 아니다’라고 하면 존중하고 반영했으면 좋겠다.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는 것 역시 중요한 정의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삶의 여정을 이해하고 깊이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면 좋겠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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