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여름 오이 탕!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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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의 2차 항암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진료를 앞두고 의사 집단휴진 뉴스가 들려온다.
예약된 날짜에 진료받을 수 있을지 아직 모른다.
만으로 20대인 애인은 지난해 갑상샘암 수술을 받았다.
여름 맛이 나는 오이를 김치처럼 곁들여 먹으며 다음 진료가 있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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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의 2차 항암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진료를 앞두고 의사 집단휴진 뉴스가 들려온다. 예약된 날짜에 진료받을 수 있을지 아직 모른다. 생명의 가치, 사회적 약속이 깨어지는 한복판에서 시스템이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불안감에 무너지지 않으려 더욱 건강한 식재료로 밥을 짓는다.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오염되지 않은 땅에서 자란 채소와 과일을 자르고 익힌다. 그저 운으로 얻은, 아직은 건강한 신체를 붙잡으려 매일 초록의 목숨을 잡아먹는다.
만으로 20대인 애인은 지난해 갑상샘암 수술을 받았다. 4.5㎝, 엄청난 크기의 결절이 로봇팔에 의해 깨끗이 제거됐으나 젊어서 회복이 빠른 만큼 암도 빨리 자랐다. 암세포는 온몸에 퍼져 있는 림프샘으로 영역을 넓히는 중이었다. 첫 번째 동위원소 치료를 받기 위해 2주간 요오드 섭취를 제한해야 했다.
애인의 식단을 함께 짜며 비건 6년차로서 비건보다 요오드 제한식이 어렵다고 느꼈다. 요오드를 제한하려면 천일염이 들어간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걸 아시는지? 천일염은 간장, 된장, 고추장에도 쓰인다. 웬만한 양념은 못 먹는다는 뜻이다. 해산물 또한 금지하며 육류도 소량만 허용된다. 우유, 계란이 들어가는 과자류와 빵류도 안 된다. 거의 비건인데 두유도 안 되고 견과류도 안 되고 웬만한 장류와 해조류까지 안 되는 고난도 식단이다. 그나마 다행으로 애인은 나와 함께 비건식을 하며 음식을 통제하는 삶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고기는 많이 안 드시는 게 좋아요.” 수술을 마치고 퇴원하기 전 들은 이 말은 내게도 조금 용기를 주었다. 물론 ‘비건=건강식’은 아니다. 누군가 내게 채식이 육식보다 건강하냐고 물으면 언제나 “본인 체질에 맞는 균형 잡힌 식단이 최고입니다. 건강한 식단은 채식/육식으로 나뉘지 않습니다”라고 답한다. 가공식품보다 자연식이 건강하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육식보다 채식이 건강하다고 말하기엔 ‘채식’이라는 용어 안에 포함된 식물성 정크푸드가 너무나 많다. 예전보다 줄었지만 나는 여전히 정크푸드를 먹는다.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의리로 산다. 입맛에 조금 맞지 않아도 안 사먹으면 없어질까봐, 비건 제품에 파이팅을 외치는 마음으로 가격도 안 보고 구매한다. 이 때문에 고기를 거의 먹지 않으면서 깨끗하게 씻은 채소와 과일을 도시락으로 먹는 애인을 보면 ‘나보다 더 비건 같아’라는 농담이 나온다.
애인은 김치를 먹고 싶어 한다. 요오드 제한식을 하는 동안은 액젓, 젓갈류를 피해야 해서 김치를 못 먹는다. 젓갈이 안 들어간 비건 김치도 천일염 때문에 먹을 수 없다. 요오드가 없는 정제염으로 직접 담가야 한다. 소수자의 입장이 되면 삶이 번거로워진다. 이 정도는 약과지만….
싱그러운 기운을 뿜는 여름 오이 하나를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짧게 잘라 돌절구에 넣는다. 쿵, 쿵, 절구 소리에 아래층 주민이 놀라 달려오지 않도록 해달처럼 배 위에 절구를 올리고 탕, 탕, 오이를 으깬다. 시원한 즙이 튀며 오이가 거칠게 찢어진다. 어쩐지 겸손해 보이는 오이 위로 뽀얀 정제염과 고춧가루, 식초를 뿌리고 참기름을 두 숟갈 넣는다. 마지막으로 통깨를 솔솔 뿌려 올리면 뽀득뽀득한 오이 위로 자꾸만 씹고 싶은 고소함이 착 감긴다. 여름 맛이 나는 오이를 김치처럼 곁들여 먹으며 다음 진료가 있길 기다린다.
글·그림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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