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화석’에 나만의 추억 간직…레진아트로 누구든 무엇이든
“유리 같기도 하고, 플라스틱 같기도 해요!”
지난 8일 서울 강서구 마곡동의 한 레진아트 공방. ‘레진’을 활용한 액세서리와 손거울을 만들기 위해 이곳을 찾은 어린이들이 작업에 한창이었다. 공방의 1일 강좌(원데이클래스)에 참여한 김지호(10)군은 “원하는 모양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며 신기해했다. 투명한 레진 액체에 캐릭터 스티커와 반짝이 가루를 넣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연신 “예쁘다”는 탄성이 나왔다.
레진 액체를 얇게 펴 바르고 유브이(UV) 램프에 넣어 굽기를 반복한 지 40여분 만에 자신의 이름 이니셜과 좋아하는 캐릭터까지 들어간 맞춤 목걸이, 바다의 색감과 모래사장 질감을 그대로 담은 미니 손거울 등이 뚝딱 탄생했다. 똑같은 재료와 램프를 사용했지만 어린이들이 만들어낸 레진아트 작품의 디자인과 용도는 각양각색이었다. 공방 곳곳에는 레진으로 만든 액자부터 거울, 책갈피와 문진 등 다양한 제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3년간 이 레진아트 공방 클라우드봉봉을 운영해온 김지원(30) 대표는 “최근 유튜브나 틱톡, 인스타그램 등에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취미 생활’로 레진이 인기를 끌면서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까지 공방을 찾는 연령대와 구성이 다양해졌다”고 전했다.
액체·램프·틀만 있으면 준비 끝
레진은 합성수지의 일종이다. ‘수지’란 본래 나무의 수액이나 수액이 굳어서 만들어지는 고분자 중합체를 뜻한다. 소나무에서 나오는 끈적거리는 송진이 대표적인 천연수지다. 수지의 성질을 화학적으로 본떠 만들어낸 화학 레진은 그동안 의료용이나 공업 용도로 주로 쓰이다가 점차 취미 생활 분야로 확장됐다. 원하는 모양은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레진은 그동안 주로 애니메이션 캐릭터 ‘프라모델’(plastic model) 제작 용도로 쓰였다. 알루미늄 금형을 별도로 제작해 프라모델을 만들려면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계 제작을 통해서는 프라모델의 표정·손짓 같은 작고 미세한 디테일을 살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레진은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고 제작 과정도 비교적 간단해 프라모델 마니아에게 사랑받았다.
그랬던 레진이 최근에는 누구든 쉽게 즐길 수 있는 ‘방구석 취미 생활’의 소재로 주목받으며 우리 생활에 다양하게 스며들고 있다. 레진을 활용하면 반지·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부터 스마트폰 그립톡, 열쇠고리 등 간단한 생활용품까지 만들 수 있다. 유튜브에서 ‘방구석 취미’ ‘간단 취미생활’이라는 키워드를 넣어 검색하면 레진으로 와인잔·보석함 만들기 등 제작 대상이 무궁무진하다. 인스타그램에서도 ‘#레진아트’라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40만개가 넘는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레진으로 만든 케이크·젤리 모형, 레진으로 장식한 나무 도마 등을 공유하며 솜씨를 뽐내고 있다.
‘가성비 좋은’ 취미 생활인 레진아트를 즐기는 엠제트(MZ)세대는 아이돌 ‘굿즈’ 제작을 즐긴다. 아이돌 포토카드를 넣은 레진 키링·액자·무드등 같은 ‘아이돌 굿즈 제작 키트’를 온라인 쇼핑몰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앨범이 발매되면 해당 앨범의 콘셉트에 맞는 디자인과 색상의 굿즈를 만들어 인스타그램 등에 공유한다. 아이돌 엔시티(NCT) 팬클럽에서 활동 중인 이주연(22)씨는 “아이돌 콘서트에서 가져온 컨페티(인조 꽃가루)를 넣은 셀프 레진 키링을 제작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또 “아이돌 팬클럽 행사에 갔다가 ‘역조공’(연예인이 팬들에게 주는 선물)으로 장미꽃 생화 한송이를 선물로 받았는데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레진으로 제작해 보관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전 세대가 추억의 아이템을 평면 코팅 형태로 보관했다면, 요즘 세대는 레진을 통해 더욱 입체적인 형태로 추억을 저장하고 있는 셈이다.
레진의 매력은 취미 생활을 즐기는 데 필요한 준비물이 거창하지 않고, 제작 과정 역시 아주 간단하다는 점이다. 레진 액체와 유브이 램프, 몰드(틀), 반짝이 등의 재료가 포함된 키트를 인터넷 쇼핑몰에서 2만~3만원대에 구매할 수 있고 ‘금손’ 아닌 초보자도 쉽게 제작할 수 있다. 먼저, 투명한 레진 액체를 말랑한 틀에 붓고 얇게 펴 바른다. 핀셋으로 작은 꽃잎이나 구슬, 캐릭터 스티커, 반짝이 가루 등 원하는 소품을 레진 액체 속으로 집어넣는다. 유브이 램프 속에 넣어 구운 뒤, 다시 레진 액체를 덧바르고 굽기를 반복한다. 물감 같은 조색제를 레진과 섞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구현할 수 있다. 몰드를 따로 사지 않더라도 스마트폰 케이스 같은 기존 제품 위에 레진을 덧발라 구워도 새로운 물건으로 재탄생한다.
수만년 전 송진 속 곤충처럼
돈 주고도 다시 살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물건을 레진 액체 속에 담아 오래도록 보관하기도 한다. 저 옛날 끈적한 송진 속에 갇힌 곤충들이 수만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생생하게 보존된 ‘호박 화석’과 같은 원리다. 결혼식 때 사용한 부케를 레진아트로 간직하는 게 대표적이다. 부케값은 일반 꽃다발과 비교해 2~3배 이상 비싼데도 결혼식 당일 들고 있다가 친구에게 던지고 나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잊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젠 부케 꽃잎을 말린 뒤 오랜 시간 보관할 수 있는 레진아트 작품으로 재탄생시킨다. 이렇게 만든 작품은 결혼반지를 걸어두는 반지 거치대나 예물을 보관하는 보석함, 신혼집에 걸어둘 인테리어 장식물로 활용한다. 그래서 요즘은 친구에게 부케를 막 던지지 않고 곱게 전달하는 신부들이 많다. 임연지(31)씨는 이렇게 받은 부케를 레진 공방에 맡겼다. 그는 “결혼한 친구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해주고 싶어 공방을 찾았다”며 “부케를 받은 친구가 부케를 본인이 직접 하든, 공방에 맡기든 레진아트 작품으로 만들어 한두달 뒤 집들이 행사에서 선물하는 게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전했다.
‘부케 레진’을 만드는 과정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먼저 꽃 종류에 따라 꽃잎을 6~8주간 말려야 한다. 강한 햇볕이나 공기 중 수분에 노출되면 꽃 모양이 변형되고 색도 변할 수 있어서, 반찬통 같은 밀폐용기에 실리카겔과 함께 넣고 서서히 건조시킨다. 클라우드봉봉 김지원 대표는 “신혼여행을 떠나는 길에 부케를 맡기고 떠나는 신혼부부가 많아 예식이 많은 주말이 가장 바쁘다”며 “꽃이 충분히 마르면 고객들이 직접 공방에 와서 나만의 웨딩 레진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고 전했다.
레진이 품는 추억은 부케뿐이 아니다.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동물을 레진으로 기억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반려동물의 털이나 수염·유치·유골·발톱 등을 레진으로 작업해 오래 보관하는 식이다. 레진아트는 이렇게 단순한 취미 생활을 넘어 슬픔을 토닥이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강원도 속초에서 반려동물의 유골을 담은 레진 작품을 제작하는 ‘봄씨테이블’ 최민선(44) 대표는 “제작 과정 동안 슬픈 마음을 위로받는다는 분들이 많다”며 “키링처럼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을 레진으로 제작할 수 있어서 소중한 반려동물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고객들이 주로 공방을 찾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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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의 흠결도 보완
이런 추세에 힘입어 레진아트에 쓰이는 부자재를 판매하는 업체들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경기도 김포에 있는 공예 부자재업체 오로라데코덴의 김현 엠디(MD)는 “레진아트를 취미 생활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레진아트 부품이 업체의 주요 효자 품목으로 자리잡았다”고 설명했다. 이 업체에서는 비즈 공예 등 다양한 디아이와이(DIY) 제품의 부자재를 함께 판매 중인데 레진아트 매출 비중이 가장 높아 일반인들을 위한 다양한 ‘레진아트 취미 패키지’를 선보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레진을 사용해 원하는 모양의 장난감을 만드는 것이 유행처럼 자리잡으면서 대형마트 장난감 코너에 ‘레진 장난감’이 쏟아지고 있다. 국내 대형 완구회사 영실업에서는 인기 간식인 ‘탕후루 미니어처’를 직접 만드는 레진 키트를 출시했고, 또 다른 완구업체 미미월드에서도 어린이들이 직접 미로를 설계해 키링으로 만드는 장난감을 선보였다. 아직 손이 여물지 않은 어린이들도 손쉽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게 매력 포인트다.
가구 제작 과정에서도 레진은 탁월한 공예 소재가 된다. 개인의 취향대로 다양한 패턴과 색상을 입힐 수 있다는 점이 가구공예에 레진을 활용하는 가장 주된 이유다. 기존 원목 가구보다 제작 비용이 최소 2배 이상 들지만, 나무의 나이테나 결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살려서 가구를 제작할 수 있어 선호도가 높다. 가구를 제작하다 숨기고 싶은 부분을 발견했을 때도 나무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되 흠결만 감추는 보완재로 환영받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이다.
경기 남양주시 나무엔(n)공방의 오민환 대표는 최근 ‘목공에 레진을 더하다’라는 이름의 1일 강좌와 정규반을 열었다. 오 대표는 “가구 제작을 배우다가 레진을 알게 된 수강생들의 요청으로 수업을 개설했다”며 “가구의 흠결을 보완할 수 있고, 또는 가구의 결을 더욱 살려 강이 흐르듯 자연의 무늬를 담은 ‘리버테이블’을 제작할 수도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개성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레진 가구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레진을 접목한 가구만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업체도 생기고 있다. 레진 가구 전문 제작업체 오션드로우 김보람 대표는 “가구 하나에도 작품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레진을 활용해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선희 자유기고가
레진아트의 두 종류 ‘UV와 크리스털’
유브이 램프를 사용해 즉시 레진을 굳히는 ‘유브이 레진’이 가장 기본적이다. 초보자들이 접근하기 가장 쉽다. 경화제를 따로 섞을 필요 없이 몰드에 넣어 유브이 램프에서 굳히면 되기 때문에 빠르고 쉽게 제작할 수 있다. 제작 과정에서 기포가 생길 수 있고, 작업 과정에서 생긴 오류를 수정하기 어려운 건 단점이다.
자연 경화 레진의 일종인 ‘크리스털 레진’은 투명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경화제를 일정 비율에 따라 혼합해야 해서 작업 공정이 유브이 레진에 비해 까다로운 편이다. 별도의 램프가 필요 없고 자연 건조해야 하는데, 작품 크기에 따라 짧게는 2~3시간에서 길게는 몇주가 걸리기도 한다. 램프에 굳히지 않아도 되므로 대형 작품 제작에 알맞다. 제작 과정에서 기포도 많이 생기지 않아 음식 미니어처 제작 등에 많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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