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하나 슬며시 너에게 건넨다… “친구야, 고마워”[강동삼의 벅차오름]
# 무뚝뚝한 남학생이 짝사랑하는 소녀에게 꾹꾹 눌러쓴 손편지처럼… 오늘은 고백해볼까
“꽃잎 하나 슬며시 너에게 건넨다, 친구야 고마워.”
병원 정기 검진때문에 모처럼 서울에 가는 길. 한 초등학교를 지나는데 현수막에 걸린 글씨가 내 가슴에 훅하고 박혔다. 어릴땐 혹시나 편지가 왔나 보려고 우체통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그땐 막연한 기다림이 사랑인 줄은 몰랐다. 그냥 애가 타고 가슴 시리고 잠못 이루고 밤중에 썼던 편지를 다음날엔 찢어 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날 밤 다시 편지를 썼다. 유치한 감성에 젖어….
그런데 놀라운 건 지금도 무뚝뚝한 남학생이 짝사랑하는 소녀에게 꾹꾹 눌러쓴 손편지를 건넨다는 사실이다. 그날밤처럼. 새삼 사랑하는 방법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때마침 신기하게도 서울가던 날.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라는 옛 유행가 가사를 따라하듯, 또박또박 써내려간 편지를 우연히 읽게 됐다. 평소 진지해 ‘찐’ 동생으로 불리는 동생이 실없이 싱글벙글 거리며, 마치 자기가 사랑고백을 받은 것처럼, 딸이 한 남학생으로 부터 받은 편지 내용의 일부(그는 휴대폰에 저장해놓고 우울할 때 들여다보는 듯 했다)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최근 좋은 일이 없어 우울했는데 이 손편지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떠벌렸다.
그 순간, 난 딸에게 온 편지를 좋아하는 아빠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어 속으로 ‘이건 뭐지?’라며 당혹스러워 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찐’ 동생의 해맑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편지 내용을 기억할 순 없었지만, 그 편지가 얼마나 설레는 문장들로 가득했었는지 내게도 또렷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문장에도 ‘사랑한다’는 단어는 단 한마디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소녀에게 반해버린 무뚝뚝한 남학생의 서툰 고백이 오롯이, 아니 절절히 스며들어 있었다. 풋풋한 첫사랑, 혹은 짝사랑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 편지를 본 사람은 ‘옛사랑의 희미한 그림자’가 오버랩되듯, 오랜만에 가슴 한 구석이 쿵쾅거릴만 했다.
# 거릴 걷다가 그대 닮은 누군가를 보게 될 때면… ‘그게 사랑’ 은 아니었을까
마치 꽃잎 하나 슬며시 너에게 건네던 그런 사랑.
‘사랑은 이렇게, 사랑은 이렇게, 잊혀질만 하면 또다시 생각이 나 어쩔 수 없네/ 하루가 지나 이틀이 지나 그래도 생각이 나면/잊어볼래도 지워보려 해도 자꾸 생각이나 어쩔 수 없네/그게 사랑…/아무렇지 않다가 다시 간절해지는 것/거릴 걷다가 그대 닮은 누군가를 보게 될 때면/거릴 걷다가 그대 목소리에 놀라 돌아볼 때면…/그게 사랑/그게 사랑…’
우리들의 첫사랑은 인디밴드 ‘달콤한 소금’의 노래 ‘그게 사랑’처럼 기억 속에 남는 그리움이다. 추억이다. 너덜너덜해진 인생에서 그래도 남아있는 비밀스럽고 소중한 페이지다.
난생 처음으로 휴양림 숙소(서귀포 붉은오름자연휴양림)에 하룻밤 예약을 했다. 요즘 부쩍 힘들어하는 그녀를 위해 덜컥 예약했다. 제주도에 살면서 제주도내 휴양림을 예약하기 쉽지 않다. 귀찮고 청승떠는 듯 싶어서. 새삼스럽게 연애 기분내는 것은 아니었다. 더위를 식힐만한 곳을 찾아 힐링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다. 우린 방전된 배터리 부부였다.
교래리 주변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저녁엔 ‘라면이나 끓여먹지’ 라는 마음으로 배낭하나 달랑 메서인지 짐도 없었다. 넓은 주차장 입구에는 캠핑장소가 있어 텐트치고 가족끼리 벌써부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사실 작열하는 태양에 헉헉 숨이 막히는 여름철엔 바다보다 숲이 휴가를 보내기에 제격이다. 휴양림 속에 앉아 있으면 마음도 안정되고 숲의 향기에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걸 느낀다. 붉은오름자연휴양림은 삼다수목장을 지나자마자 사려니숲길을 가기 직전 1㎞ 쯤 전에 오른쪽으로 꺾으면 만난다. 태양을 피하러 가는 길이다.
#남학생이 얼굴 붉히며 수줍게 고백하는 듯한 붉은오름…휴양림에서 새벽 커피 한 잔의 치유
휴양림 숙소에 배낭을 던져놓고 주변의 무장애숲길을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 붉은오름(서귀포시 표선면 남조로 1487-73)으로 향했다. 오름에 덮인 흙이 유난히 붉다고 해서 붙여진 붉은 오름은 실제로 오름 대부분이 붉은 화산송이인 ‘스코리아’로 덮여 있다. 남학생이 얼굴 붉히며 수줍게 고백하는 듯한, 그런 붉은오름이다. 삼나무와 해송이 주종을 이루면서 숲이 울창하고 중턱부터는 낙엽수림 등 자연림의 숲을 이룬다. 그러나 시작부터 다소 가파른 계단을 지나야 해서 숨가쁘게 10여분을 지나야 제법 산세를 감상할 수 있다. 이유없이 얼굴이 상기돼 붉어진다. 상산나무로 시작해 참식나무(녹나무과), 쥐똥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서어나무, 졸참나무들이 있는 자연림을 만날 수 있다.
표고 569m에 둘레 3046m, 면적이 58만 5044㎡에 이르는 오름으로 정상에 오르면 정면으로 민오름, 머체왓, 거린악, 사려니오름, 마흐니오름 등 한라산 일대의 오름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멀리 제주시내까지 아른거리는 정상 전망대였다. 붉은오름건강등반로 1.7㎞를 돌아오다 보면 상잣성 숲길 3.3㎞로 이어진다. 하산까지 1시간 30분 거리.
숲속의 집 바로 앞에는 목재문화체험장이 있는데 꼭 한번 둘러볼만 하다. 목재놀이터를 비롯, 아로마테라피실, 유아목재체험실, 목공체험실, 편백삼나무체험실 등이 갖춰져 있어 숲의 향기를 그대로 내부로 옮겨놓은 듯 향기에 취해 돌아다닌다. 특히 어린자녀를 둔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놀이공간으로 꾸며져 있고 나무가 너무 오래돼서 돌로 바뀐 ‘규화목’도 구경할 수 있다. 숲속 식물에서 추출된 천연오일의 향을 체험하면 긴장했던 몸이 완전 무장해제된다. 퍼, 로즈우드, 사이프러스 등 천연향기 시향코너에서 느끼는 나무마다의 다른 향기들. 우리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향기가 난다. 나는 로즈마리 허브 향기나 솔 향기, 편백나무 향기가 나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뜨근뜨근한 온돌에서 무거워진 몸을 풀고 나니 숲속에서의 하룻밤이 훌쩍 지난다. 새소리만 들리는 숲속에서 맞는 아침은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아침이다. 백색소음인 자연의 소리(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보다 좋은게 또 있을까. 푸릇푸릇한 숲속 데크에서 커피한잔하는 시간…. 추억의 책장에 남겨질 듯 싶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 숲속의 정원에서 원시림에서 만난 눈꽃 선물…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는 말찻오름
말찻오름은 한여름 산책길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적합한 장소로 보여진다. 해맞이길 입구에서 부터 펼쳐지는 야자매트길은 정상까지 쭉 펼쳐진다. 돌계단이 많고 나무계단이 많으면 걷기 힘든데 말찻오름은 시작부터 끝까지 야자매트로 길이 정비돼 있어 폭신폭신하다. 산책길 양옆으로 쭉쭉뻗어오른 삼나무숲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더욱이 곶자왈 깊은 곳까지 들어온 느낌이 들 정도로 한적하고 호젓해 도시의 칼라소음이 아닌 백색소음이 지친 이들을 어루만져 준다.
태양을 피하고 싶은 사람에게 꼭 권하고 싶은 오름이다. 정상 전망대에서 만나는 풍경은 조금 아쉽지만, 숲과 하나되는 느낌이 드는 오름이다. 숲속의 정원을 걷 듯, 원시림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인근에 있던 물찻오름의 물찻이 물이 괸 못이라면 ‘몰찻’(말찻)은 말의 방목장이라는 제주어에서 나온 뜻이란다. 높이 653.3m, 둘레 2623m, 총면적 40만 3935㎡ 규모의 기생 화산으로 언성악(言城岳) 또는 마을성악(馬乙城岳)이라고도 한단다. 물찻오름(높이 717.2m) 북동쪽에 인접해 있는 오름으로 정상부는 비교적 평평하며 가운데가 우묵하게 파인 말굽형 분화구가 있다. 동쪽 기슭으로 내려오다 보면 여러 개의 송전탑과도 만난다. 2시간여 소요되는 거리지만, 방전된 배터리를 100% 채워지는 마음 충전소같은 오름이다.
무엇보다 세월의 풍파에도, 대지에 붙어 공생공존하는 숲에서 더불어사는 삶을 만난다. 경허해지는 마음충전소였다. 태풍에 스러진 나무들은 옆에 있던 친구의 어깨에 기대어 다시 살아나고 뿌리째 흔들려 장애를 입은 친구는 앞에 두팔을 벌리고 안아주는 나무 덕에 외롭지 않게 삶을 지탱하고 있다. 몸이 으스러지는 사고를 당한 친구들을 보살피는 숲에서 죽어가던 친구는 소생하고 있었다. 그 호흡소리, 포레스트 사운드를 듣는 것만으로도 헐거워진 삶이 청량해지는 느낌이다. 홀로 살 수 없다는 진리와 마주하는 원시림같은 말찻오름에서의 깨달음!, 그 느낌표!
짧은 1박. 더 쉬었다 가라 하며 나를 부르는 숲에서 쑥쓰럽게도 그녀에게 꽃잎을 끝내 슬며시 내밀지 못했다. 하지만 말찻오름을 내려오는 숲길에서 뜻밖에 자연스럽게 초여름의 눈꽃을 선물했다. 때죽나무 하얀 꽃잎들이 눈꽃보다 더 흐드러지게 나무데크 산책로를 하얗게 수놓고 있었다. 그 향기에 취한 듯, 그녀의 작은 손을 꼬옥 붙잡고 내려왔다.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한진그룹 소유의 제동목장의 편백나무숲길
햐얀 눈꽃같은 때죽나무의 꽃길을 내려왔을 때 계획에 없던, 가고 싶은 곳이 불현듯 생각났다. 경로이탈. 가끔 여행지에서 경로이탈하는 즐거움을 만끽해보시라. 또 다른 힐링이다. 숲속의 집을 체크아웃한 뒤 찾아간 곳은 교래리 제동목장. 한진그룹에서 운영하는 제주도 최대의 목장으로 꼽히는 곳으로 인생샷을 얻을 수 있는 로맨틱한 고백장소이자 웨딩촬영 명당으로 입소문이 난 곳이다.
아쉽게도 사람 발길이 잦아지면서 사유지인 목장 입구엔 출입을 통제하는 팻말이 걸려있다. 그러나 제동목장 입구 약 150m에는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양쪽으로 빽빽하게 들어차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장마철이 시작되는 지금이야말로 사진 속 한컷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사진작가가 아니더라도 작품 하나는 건진다.
주차 공간이 없기 때문에 삼다수숲길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어서 이동하는 것을 권유하고 있다. 살짝 비를 뿌리기 시작한 이날도 예비 결혼 커플의 달달한 사진촬영이 한창이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 검정 턱시도를 한 남자, 그 남자는 하얀 드레스가 더러워질까봐 드레스 밑자락을 꼭 붙잡고 있었다. 마치 한강의 소설 ‘흰’에 나오는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라고 독백하는 듯 했다.
아직까지 고백하지 못한 당신도 쑥스럽지만 이곳에서 오면 고백할 용기가 생길 지 모른다. 어쩌면 그 남학생의 수줍은 고백 편지처럼, 초등학교에 내걸린 현수막에서 전해져 오는 꽃잎의 떨림처럼.
글 사진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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