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통했다…K-바이오, 아웃사이더에서 단숨에 중심 도약
[편집자주]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이 잇따른다. 특히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을 직접 공략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연간 매출액 1조원을 넘는 토종 '블록버스터' 의약품의 등장도 눈앞이다. 지금은 K-바이오가 글로벌 시장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시기다. K-바이오가 글로벌 시장에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전략을 고민할 때다.
올해는 사실상 셀트리온의 미국 시장 진출 원년이나 다름없다. 미국 FDA(식품의약국)에서 신약으로 인정받은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짐펜트라'(램시마SC)의 직판(직접판매)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셀트리온의 짐펜트라 미국 직판은 한국산 블록버스터의 등장이란 결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문가들은 짐펜트라의 미국 시장 매출액이 내년 1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짐펜트라, 한국산 블록버스터 신약 나온다"
셀트리온은 올해 짐펜트라의 미국 시장 진출에 전사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은 직접 미국 전역을 돌며 현장 영업에 나섰다. 서 회장을 필두로 미국 현지에 구축한 셀트리온 영업 조직이 현지에서 처방권을 가진 의사들과 관계를 맺었다. 올 하반기 대대적인 광고 활동 등 마케팅을 강화할 계획이다.
서 회장은 "미국 각지에서 그 동네 병원의 처방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키닥터'(KOL)들을 만나 짐펜트라를 알렸다"며 "미국 시장에서 통할 수 있단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최병서 셀트리온 글로벌마케팅본부장(전무)은 "오너(소유주)가 직접 미국 의사들과 만나서 짐펜트라의 경쟁력을 소개하니 확실히 효과가 있다"며 "짐펜트라가 미국 시장에 빠르게 침투하는 결정적 이유 중 하나로 서 회장의 현장 영업 효과를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짐펜트라는 미국 시장 진출을 발판삼아 한국산 블록버스터 신약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지에서도 짐펜트라에 대해 유일한 SC(피하주사) 제형 인플릭시맙 치료제로, 환자의 복용 편의성을 높일 수 있는 신약으로 주목하고 있단 평가다. 실제 미국에서 만난 여러 의사가 짐펜트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효능과 안전성 등 임상 데이터가 좋을 뿐 아니라 환자의 의약품 선택권을 높일 수 있는 유용한 치료제로 기대하고 있다"고 호평했다.
이달 김민정 DS투자증권 연구원은 셀트리온에 대해 "짐펜트라의 성공에 대해 확신이 든다"고 평가했다. 김 연구원은 짐펜트라의 미국 시장 매출액이 올해 3056억원, 내년 9853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르면 내년 짐펜트라가 블록버스터에 등극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짐펜트라가 블록버스터 신약으로 거듭나면 글로벌 제약·바이오 시장에서 한국산 바이오 의약품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란 분석이다. 특히 신약을 비롯한 바이오 의약품은 이익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산 블록버스터의 등장은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이 미래성장동력으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 SK바이오팜·유한양행도 블록버스터 도전…K-바이오 위상 높인다
한국산 블록버스터 후보로 SK바이오팜의 '엑스코프리'(세노바메이트), 유한양행의 '렉라자'(레이저티닙)도 빼놓을 수 없다. 짐펜트라와 엑스코프리, 렉라자가 모두 글로벌 시장에서 블록버스터로 도약한다면 한국산 바이오 의약품의 위상은 몰라보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SK바이오팜의 뇌전증 신약 엑스코프리는 이미 미국 시장에 진출해 처방을 확대하고 있다. 엑스코프리의 미국 매출액은 지난해 2702억원으로 전년 대비 약 60% 늘었다. 올해 매출액은 4000억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엑스코프리의 미국 시장 선전을 토대로 SK바이오팜은 흑자 기업으로 변모했다. 미국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신약 한 품목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단 의미다.
유한양행은 폐암 신약 렉라자의 미국 FDA 허가를 앞두고 있다. 올 3분기 승인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렉라자는 아미반타맙SC와 병용 임상 3상에서 IV(정맥주사) 제형과 유사한 유효성을 확인했다. 부작용을 낮출 수 있는 데다 투약 편의성이 높아 미국 시장에서도 통할 만하단 분석이다. 다올투자증권은 렉라자의 신약 가치를 3조2500억원으로 평가했다. 렉라자 관련 시장 규모는 2025년 약 10조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국내 기업이 개발한 바이오 의약품이 미국 시장에서 줄줄이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어 고무적이란 평가다. 의약품 CMO(위탁생산)나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를 넘어 국내 기업이 개발한 신약이 글로벌 시장에서 활약한다는 의미도 남다르다. 특히 한국산 바이오 의약품에 대한 글로벌 시장의 평가가 개선될수록 후속 품목의 허가나 기술이전, M&A(인수합병) 등에서 더 많은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
서정진 회장은 미국에서 짐펜트라를 블록버스터로 키워 국내 바이오 산업 성장에 기여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에서 꾸준히 현장 영업을 뛰면서 이 시장의 특징을 이해하게 됐는데, 분명히 어려운 시장이지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부딪힌다면 큰 성과를 낼 수 있단 확신이 들었다"며 "셀트리온뿐 아니라 더 많은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이 미국 시장에서 경쟁하며 실력을 입증하고 좋은 결실을 맺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웃사이더'였던 K-바이오가 메이저 반열에 오른 건 비교적 최근이다. 불과 2~3년 전인 코로나19(COVID-19) 팬데믹(대유행) 기간 국내 방역시스템이 주목받으면서 K-바이오는 뜻밖의 도약 기회를 얻었다. '스피드 경영'을 내세운 한국 기업은 신약 개발부터 CDMO(위탁개발생산)까지 공격적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 글로벌 변방에서 중심으로 떠오르며 입지 굳히기에 나섰다.
◆ 입구 옆 '명당' 차지, 4000명 몰린 삼바…입지 굳혔다
한국 기업의 강점은 '속도'와 '품질'이다. 특히 미국의 생물보안법 추진으로 '바이오 안보'가 떠오르면서 국내 대표 바이오 CDMO 기업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존재감이 더 돋보인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올해 1분기 기준 시가총액 글로벌 상위 20위 제약사 중 16곳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지난해 12월 말까지 14곳이던 빅파마(대형 제약사) 고객이 올해 2곳 더 늘었다.
전략은 '초격차'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2011년 설립 초부터 대규모 투자로 생산시설을 확충, 경쟁사와 거리를 좁혔다. 인천 송도 제2바이오캠퍼스 5공장 설립이 내년 4월 완공되면 세계 최대 규모인 총 78만4000ℓ(리터)의 생산능력을 확보한다. 6~8공장 및 제3바이오캠퍼스 설립도 계획 중으로, 2032년까지 총 생산능력 132만4000ℓ 확보가 목표다. 삼성바이오로직스 관계자는 "고객사 측에서 계약 제품 및 기존 계약 물량 생산 규모 확대를 요청하는 등 파트너십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달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2024 바이오 인터내셔널 컨벤션'(바이오 USA)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작년에 이어 전시장 입구 옆 명당에 국내 개별 기업 중 가장 큰 42평(139㎡) 크기의 부스를 마련했다. 부스 방문객 수는 총 4000여명, 지난해(약 3000명) 대비 1000명가량 더 늘었다. 해외 업계 관계자들은 "메인 위치에 부스가 있어 바로 알아봤다" "생물보안법 이후 부스가 더 북적인다" 등 반응을 보였다.
수주 성과도 압도적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최근 박스터 헬스케어와 맺은 바이오 의약품 위탁생산계약 규모를 기존 168억원에서 2509억원으로 키우는 변경계약을 체결했다. 이를 포함 회사는 올해 5건의 계약을 따내며 수주액이 1조원을 넘었다. 바이오 USA에서도 90건의 파트너링 미팅이 이뤄져 향후 고객사 확대가 기대된다. 회사 관계자는 "기술이전 기간을 업계 평균 절반 수준인 3개월로 단축, 긴급 물량이 필요해도 생산 일정을 준수해 고객 만족도가 높다"며 "생산능력 및 ADC(항체-약물접합체) 등 포트폴리오 확대, 글로벌 거점 확대의 3대 축 확장 전략을 중심으로 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고 자신했다.
◆ "한국 사람 이렇게 많은 건 처음"…저력 과시한 'K-바이오'
삼성바이오로직스 외에도 국내 기업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다. 셀트리온도 바이오 USA 행사장에 42평 크기의 부스를 설치, 작년(28평) 대비 1.5배 몸집을 키웠다. 행사 기간 1600명이 넘는 업계 관계자가 방문, 전년 대비 2배 이상의 방문객 수를 기록했다. 올해 처음 부스를 차린 SK바이오팜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장녀인 최윤정 SK바이오팜 사업개발본부장(상무)이 행사에 참석, 약 50~70건의 비즈니스 미팅에 직접 참여하며 홍보 활동을 강화하기도 했다. 한국바이오협회의 '한국관' 전시에는 유바이오로직스·알테오젠 등 기업 26곳이 부스를 차렸다.
한국바이오협회에 따르면 올해 행사에는 전 세계 70여개국 1만9000명 이상이 다녀갔고, 이 중 한국인 참관객은 1300여명으로 개최국인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았다. 현장에서 만난 해외 업계 관계자는 "바이오 USA에 한국인이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본다"며 놀라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 국내 업계 관계자는 "과거 한국 업체는 제조·바이오시밀러 중심이란 인식이 높았지만, 최근 국제행사 참여율이 늘면서 신약 개발·백신 등 분야에도 한국이 있다는 포지셔닝 확산이 기대된다"며 "국내 제약사 약물 중 블록버스터 후보로 거론되는 약물이 있단 점도 큰 변화"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한국은 중국·인도 대비 높은 품질과 합리적 비용으로 연구·개발을 빠르게 수행한다"며 "IT 경쟁력이 우세한 한국 입장에선 최근 글로벌 제약 산업과 AI(인공지능) 기술이 빠르게 접목되고 있단 점도 중요한 기회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근희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국내 기업은 베스트 인 클래스(계열 내 최고 약물), 패스트팔로어(신제품·기술을 빠르게 쫓는 전략) 제품 개발에 뛰어나다"며 "글로벌 제약사와 빠르게 계약 체결이 이뤄졌던 만큼 경쟁력은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김도윤 기자 justice@mt.co.kr 홍효진 기자 hyost@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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