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 뜯으려다 인내심 뜯기는 악마의 포장…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그거사전 - 23] 뜯다가 짜증 폭발하는 플라스틱 포장 ‘그거’
‘겟도바시’라는 정체불명의 단어는 예상대로 일본어다. ‘걷어차다’ ‘일축하다’라는 의미의 게토바시(蹴飛ばし)가 발음 대로 정착한 것인데, 이는 진공 성형 공정 때 기계의 페달을 발로 밟아서 작동시키는 모습에서 나온 명칭이란 설이 유력하다.
플라스틱 시트의 재질은 다양하게 쓸 수 있지만 포장재 용도로는 주로 PP(폴리프로필렌)·PET(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등이 많이 쓰이는 데 문제는 이 재료들의 강도가 무척 높다는 점이다. 거기에 더해 플라스틱 포장재끼리 맞붙이고 고열로 녹여서 밀봉하는 열접착(히트 실링) 포장 방식을 쓸 경우 손아귀 힘만으로 뜯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어떻게든 뜯어낸다고 해도, 날카롭게 뜯긴 부분에 다치기 일쑤다. 가위나 칼을 이용해 뜯다가 다치거나 내부의 제품이 손상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악마의 포장’이라는 세간의 비난이 과하지 않다.
블리스터 포장 때문에 태어난 표현도 있다. 바로 포장 분노(wrap rage)다. 포장, 그중에서도 블리스터 포장을 열 수 없어서 분노와 좌절이 극도로 치솟는 상황을 뜻한다. 2003년 영국에 있는 일간지인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이 용어는 언어학 교수와 작가 등으로 구성된 미국방언학회(ADS)에서 2007년 가장 유용한 단어로 선정하기도 했다. 2017년 제프 베조스 아마존 창업자 겸 이사회 의장(당시 CEO)은 한 대담에서 ‘포장 분노’를 언급하며 구매자의 상품평 중 포장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으며 “(이는) 어떠한 혁신적 시도보다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한 바 있다. 블리스터 포장의 불편함에 대해 공감해준 건 고마운데, 아마존의 ‘자칭 친환경’ 종이 포장이 얼마나 허술한지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마냥 기쁘지는 않다.
무엇보다 블리스터 포장이 없으면 약(藥)도 없다. 엄격한 조건이 따라붙는 의료·제약용 멸균 플라스틱을 블리스터 포장 재료로 쓸 수 있어 의약품·의료기기 포장에 쓰이기 때문이다. 자동화된 제조 공정을 통해 불순물과 오염 물질이 공급망에 유입될 가능성이 작고, 개별 밀봉 방식인 덕에 습도와 온도로부터 의약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 대용량 병 포장을 주로 사용하던 북미 지역에서도 블리스터 포장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이유다.
블리스터 포장 중에는 클램셸(clamshell·조개 껍데기) 방식도 있다. 중앙에 경첩(힌지) 부분을 중심으로 접어서 뚜껑이 달린 포장 용기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접착 방식이 아니라, 겹쳐서 결합하는 방식이 많아 쉽게 여닫을 수 있고, 포장 분노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투명한 플라스틱 클램셸 포장은 딸기나 블루베리 따위의 무른 과일이 손상되지 않게 포장하는 용도로 많이 쓰이는데, 딸기류를 판매·유통하는 미국 기업 드리스콜스가 1990년대 처음으로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다음 편 예고 : 새 양말 사면 달린 금속집게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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