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라디오 방송 휩쓴 ‘하모니카 스타’ 김파원
1935년 1월1일자 매일신보에 문화예술계 1인자를 소개하는 기획이 실렸다. 이 중 ‘하모니카 대장’으로 소개된 김파원(金坡 園)은 1930년대 라디오를 주름잡은 하모니카 스타였다.
1933년 4월26일 조선어 제2방송을 시작한 경성방송국은 매일 오후 6시 동화, 동요 등 어린이 프로그램을 20분~30분 내보냈다. 하모니카 연주는 이 시간대 주요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제2방송 첫날인 1933년 4월26일 하모니카 이중주를 시작으로, 매달 2~3회씩 고정 출연했다. 하모니카가 당시 어린이와 학생, 성인을 막론하고, 대중적인 악기로 환영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1933년 경성방송국 하모니카 프로그램 독차지
김파원은 이 분야의 압도적 1인자였던 듯하다. 경성방송국은 4월 26일 첫 방송 이래 1933년에만 하모니카 연주를 19번 내보냈는데, 김파원은 이 중 15번 출연했다. 독주와 2중주가 각각 5회씩이었고, 3중주 1회, 밴드 지휘가 3회, 5중주 지휘가 1회였다.
5중주는 같은 멤버로 10월31일, 11월24일 두차례 연주했는데, 11월 연주에 김파원이 지휘자로 올라있는 것으로 보아 10월에도 비슷한 역할로 참여한 듯하다. 경성방송국 하모니카 연주의 84%(총 19회중 16회)를 김파원 1인이 주무른 셈이다.
◇'하모니카 1인자’
‘신문을 통하여 라디오를 통하여 프로그램이나 혹은 직접 간접으로 김파원군이라고 하면 그가 하모니카로서는 조선에서 제1인자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이다. 조선에서 라디오가 설치된 후 그가 하모니카 방송은 독점적으로 하였을 뿐아니라…’(‘하모니카 대장 김파원군’, 매일신보 1935년1월1일)
하모니카 역시 일본을 통해 들어왔기에 일본인 연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인 연주자 김파원은 ‘희귀한 사계(斯界)개척자’로 대접받았다. 김파원은 어떻게 하모니카 연주자가 됐을까. 신문은 이렇게 소개한다.
‘보통학교 1학년때 장난감으로 한자루를 사서 불어온 후 하루라도 불지 않으면 입안이 부둑하야 견디지 못할 뿐 소화가 불량할 때에 한번 하모니카를 들고 삐빼하고 불기만 하면 유리병을 씻어내리고 보는 것같이 시원하고 마치 나폴레옹이 수십만 병졸을 거느리고 행진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유쾌한 감은 도저히 형용할 수없었다’(‘하모니카 대장 김파원군’)
◇'나폴레옹이 수십만 거느리고 행진하는 것같이 유쾌’
김파원은 1930년대 중반 관립 경성고상(高商·고등상업학교·서울대상대 전신)하모니카 밴드와 중앙고보 밴드를 지도하는가 하면, 수십명의 제자 겸 팬으로 구성된 개인 밴드(파원 밴드)까지 이끌었다. 1933년 12월7일엔 중앙고보 하모니카 밴드를 지휘해 경성방송국에 출연했다. 현제명이 작곡한 중앙고보 교가를 합창부와 함께 연주한 후,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 오펜바흐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의 ‘뱃노래’ 헨델의 ‘라르고’ 등을 연주했다.(‘중앙고보하모니카밴드’, 조선일보 1933년12월7일)
1930년대 라디오에 등장한 하모니카 프로그램은 이렇듯 동요나 유행가보다 가곡이나 오페라 아리아, 클래식 소품이 주종을 이뤘다.
◇전조선하모니카 연맹, 전조선 대회도
김파원은 전(全)조선하모니카 연맹을 결성, 1935년 11월9일 밤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전조선 하모니카 독주콩쿠르 개최를 주도했다.조선중앙일보 학예부가 콩쿠르를 후원했다. 40명이 참가한 예선을 통과한 10명(일본인 4명 포함)이 실력을 겨룬 끝에 열아홉살 최성재가 우승을 차지했다. 선린상업학교 야학부를 다닌 최군은 식산은행을 거쳐 조선제련회사에 재직중이었다. 하모니카를 시작한 지 5년만에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조선중앙일보 1935년11월10일)
김파원은 이틀에 걸쳐 심사평(조선중앙일보 1935년11월16일~17일)을 쓰면서 이런 콩쿠르가 ‘하모니카 음악을 확립시켜서 사회에 없지 못할 ‘에네루기-(에너지)’가 되게 하기를 간망한다’고 했다.
전조선 하모니카 연맹은 이듬해에도 콩쿠르를 개최했다. ‘전 조선하모니카 연맹에서는 오는 10월3일부터 경성공회당에서 제2회 전 조선 하모니카 독주콩쿨대회를 개최한다는 바 심사위원은 홍난파 김파원 길택실(吉澤實) 송일항 하야영길(河野英吉) 최성두 궁촌민부(宮村敏夫) 학전광(鶴田廣) 이완선 등 제씨라 하며 상품은 우승컵이 있고 입상자는 기념방송을 하리라 한다.’(‘하모니카 콩쿨’, 조선일보 1936년 10월3일)
◇하모니카 100주년 기념음악회
하모니카는 1920년대 들어 어린이, 청소년을 중심으로 학교, 사회단체에 널리 보급됐다. ‘하모니카 강습회’ 소식도 여기저기 나고, 음악회에도 하모니카 연주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모니카 발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도 1927년 11월26일 오후7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조선의 대표적 하모니카 연구단체인 ‘고려리드밴드’가 주최했다.신문은 ‘만 근 10년 이래 하모니카는 장족의 진보로 일반 음악의 영역에까지 달하였다’(하모니카 백년 기념음악, 매일신보 1927년11월25일)고 평가했다.
라디오는 하모니카 보급의 1등공신이었다. 김파원을 중심으로 연주자와 밴드들이 매주 1차례씩 방송에 출연해 하모니카 연주를 들려줬으니, 대중들이 친숙하게 느꼈을 법하다. 경성방송국 프로그램에서 하모니카 만큼 대접받은 악기도 드물 만큼 전성기를 구가했다.
◇윤복진의 ‘하모니카’
스물 둘 아동문학가 윤복진이 1929년 동요 ‘하모니카’를 작사한 것도 이 작은 악기의 인기를 반영한 덕분이다. ‘욕심쟁이 작은 오빠 하모니카는/큰 아저씨 서울가서 사보낸 선물/작은 오빠 학교갔다 집에 오면요/하모니카 소리맞춰 노래불러요/도레미파 솔라시도 부르고서는/도미솔도 도솔미도 재미난다요’(‘하모니카’1절, 중외일보 1929년9월28일)
이 노래는 홍난파가 1929년 펴낸 ‘조선동요백곡집’ 상권에 실리면서 히트곡으로 떠올랐다. 경성방송국에서도 심심하면 흘러나왔다. 다만 ‘우리 아기 불고노는 하모니카는’으로 시작하는 요즘 동요(’옥수수 하모니카’)와는 가사가 약간 다르다. 윤복진(1907~1991)이 훗날 월북하면서 그의 가사를 쓸 수없게 되자 홍난파기념사업회가 1964년 윤석중에게 노랫말을 고쳐달라고 요청해 노래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1955년까지 라디오 출연
김파원은 1930년대 중반 야마하 하모니카 밴드를 이끌면서 경성방송국에 자주 출연했다. 독주 출연도 꾸준히 이어갔다. 광복 후인 1950년대 중반까지도 1년에 두어차례 라디오에 출연했다. 신문에 실린 프로그램 편성표에 따르면, 김파원은 1954년 6차례나 방송에 출연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오후 6시전후 ‘어린이 시간’이었다. 6.25 전란 직후 황량했던 시대에 정겨운 하모니카 연주로 동심(童心)을 달래준 셈이다. 1955년 8월4일 오후6시30분 서울방송에 출연, ‘여름노래 3종’을 독주로 들려준 게 마지막이다.
김파원의 행적이나 집안, 배경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인터뷰는 물론 그를 다룬 기사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100년전 하모니카 1인자로 군림하며 라디오방송을 휩쓸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도 드물다. 하모니카 열기가 예전같지 않아서 그런건지, 망각이 일상화된 분위기 탓인지 헤아릴 길 없다. 김파원은 이렇게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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