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총보다 강하다, 국방부 진중문고
[아무튼, 레터]
어느 출판사 대표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표정이 밝았다. 불황을 견디며 낸 책이 베스트셀러라도 된 것일까. 그가 종이가방에서 책 두 권을 꺼냈다. 제목부터 표지, 두께까지 똑같았지만 크기는 달랐다. 둘 중 작은 책에 노란 딱지가 붙어 있었다. ‘국방부 진중문고’
진중문고(陣中文庫)는 국군 각 부대 도서관이나 생활관에 비치되는 책들을 가리킨다. 6·25 때 참전한 미군에 의해 병영 도서관이 운영됐지만 휴전과 함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한국 국방부는 이 진중문고 사업을 1978년부터 시작했다.
분기마다 약 20종을 선정한다. 지난달 초 발표된 올해 1차 목록은 ‘전쟁은 어떻게 기술을 발전시켰나’ ‘전투감각’ ‘강감찬과 고려거란전쟁’ ‘어쩌다 군대’ ‘말의 진심’ ‘대화의 정석’ ‘관계의 언어’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 ‘우리는 미래를 가져다 쓰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경제학’ 등 18종.
진중문고는 군복 건빵 주머니에 딱 들어갈 만한 사이즈로 보급된다. 출판사에는 가뭄에 단비, 국군 장병들에겐 마음의 양식이다. 이병이나 일병일 때는 소설 등 흥미 위주 책을 많이 읽지만 진급할수록 실용서와 자기 계발서를 많이 읽는다고 한다.
요즘 출판사들은 초판 1쇄를 1000부만 찍고 있다. 그래도 다 판매하지 못해 창고에 쌓이는 경우가 많다. 진중문고에 선정된 출판사 대표는 “20년 만에 처음이라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며 “급하게 1만여 부를 작은 판형으로 제작해 보냈더니 한 달 뒤 책값이 100% 입금됐다”고 했다. 군납업자가 된 것을 축하했다.
독일 나치스(Nazis)는 1933년 5월 10일 밤 책 화형식을 벌였다. 유대인, 사회주의자, 반(反)독일적인 작가 등이 쓴 책을 태우며 독일 문학을 불로 정화했다. 외신들은 그것을 보도하며 ‘책 학살’로 불렀다. 결과를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책이 소각되는 곳에서는 인간성도 소각된다.
진중문고는 2차 세계대전 중 1942년 미국에서 탄생했다. 책을 승전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작가들과 정부가 거들었다. 작고 가벼운 이 페이퍼백은 불안과 공포를 밀어내고 싶을 때, 웃음과 희망에 굶주릴 때, 가족과 친구가 보고 싶을 때 참호 속 군인들을 위로했다. 소총이 목숨을 지켜주는 무기였다면 책은 정신을 지켜주는 무기였다. 책은 총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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