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향한 불같은 사랑,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을 낳다

2024. 6. 22.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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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의대 정원 확대 문제로 몇 달째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의대 학생이나 의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국민의 커다란 관심사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프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의사라는 직업은 늘 선망의 대상이고 많은 부모들은 자식을 의사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 의사인 부모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의사 자식이라고 다 의사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베를리오즈가 그랬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그를 의사로 만들고자 했으나 그는 결국 음악가가 되었다.

셰익스피어 심취, 원작 읽으려 영어 배워

프랑스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베를리오즈. 그는 교향곡에 최초로 문학적인 서사를 도입해 ‘표제 음악’이라는 새로운 관현악곡 스타일을 창시했다. [사진 사회평론]
베를리오즈는 프랑스 남동부 라 코트 생트 앙드레 마을의 유복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루이 베를리오즈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의사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장남인 베를리오즈의 교육에 관심이 많아 10세부터는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자신이 직접 집에서 라틴어, 철학, 수사학, 지리학 등을 가르쳤다. 어린 시절 베를리오즈는 여행에 관한 책과 고전 문학을 좋아했으나 아들이 의대에 진학하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아들의 커리큘럼에 해부학을 추가하였다.

만 17살이 되자 베를리오즈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대를 선택했고 집을 떠나 파리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의대 생활이 즐거울 리 없었다. 특히 그는 시체를 해부하는 일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나중에는 결국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아버지가 보내주는 넉넉한 용돈. 그 덕에 그는 파리의 문화적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베를리오즈가 가장 즐겨 찾던 곳은 파리의 오페라하우스와 국립 음악 도서관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음악을 향한 갈망은 커졌고, 글루크의 ‘이피제니’ 공연을 보고 압도당한 순간 자신의 미래가 의사가 아닌 작곡가에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대부분의 자식은 한 번쯤은 부모를 놀라게 만드는가 보다. 의대를 졸업하면서 베를리오즈는 음악가가 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그의 부모는 그의 생각을 바꾸게 하려고 최소한의 생활비 만을 보내는 극약 처방까지 내놓았다. 하지만 베를리오즈는 뜻을 꺾지 않았다. 파리에서 제일 싼 하숙방을 구해 친구와 같은 방을 쓰면서 하숙비를 절약했고, 닥치는 대로 음악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리고는 독학으로 작곡을 하더니 2년 만에 당당히 그렇게 어렵다는 파리 음악원에 합격함으로써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하고야 만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많지 않다. 그렇게 베를리오즈 의사 만들기 프로젝트는 폐기되었다.

본격적으로 음악공부에 뛰어들자마자 그를 사로잡았던 작곡가는 베토벤이었다. 그는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과 ‘운명 교향곡’ ‘교향곡 7번’의 파리 초연을 듣고 그 순간부터 베토벤을 자신의 우상이자 언젠가는 꼭 넘어서야 할 목표로 삼았다. 그 때문일까. 그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급진적인 양식의 작품을 써서 보수적인 음악원 교수들을 경악하게 했다. 그러나 너무 시대를 앞선 시도는 당대에 인정 못 받기 마련. 그는 로마 대상에 세 번씩이나 낙선했고, 결국 자기 스타일을 숨기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곡을 출품하고서야 입상할 수 있었다.

베를리오즈가 사랑한 여배우 해리엇 스미스슨.
베를리오즈의 작곡을 위한 창조적 영감은 학교에서 배운 대위법과 작곡기법이 아니라 괴테와 셰익스피어의 문학에서 왔다. 괴테의 작품 중에서 그가 특히 매료되었던 작품은 ‘파우스트’로 그는 첫 장을 읽자마자 빠져들어, 식음을 전폐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으며, 이것은 훗날 ‘파우스트의 8장면’과 같은 작품들의 원천이 되었다. 한편 셰익스피어에 대한 열광은 그가 음악원에 입학한 첫해에 파리 오데옹 극장에서 ‘오델로’ 공연을 본 순간 시작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읽기 위해 영어를 배울 정도로 그는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연극에 심취했다.

1830년 파리.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혁명의 도화선이 된 7월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베를리오즈는 그해 말 교향곡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환상 교향곡’을 발표한다. 이전까지 교향곡이 순수하고 추상적인 음악적 요소들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했다면 베를리오즈는 교향곡에 최초로 문학적인 서사를 도입하여 교향곡을 악기가 연기하는 연극으로 만들었다. 이른바 표제 교향곡이다. 베를리오즈가 선택한 표제는 불같은 사랑이었다. 그는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열정”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관현악 음색을 창조해냈다. 오케스트라 규모는 커졌으며 악기의 조합은 대담하고 역동적이어서 강렬한 극적 효과를 냈다. 음악이 고전주의와 결별하고 낭만주의를 선언한 순간이다.

‘환상 교향곡’은 작품 속 주인공이 작곡가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초연에서부터 큰 화제가 되었다. 베를리오즈는 자신이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이야기를 “한 예술가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아 음악으로 풀어냈다. 이 곡에서 주인공은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무도회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그녀를 절절히 그리워하나 그녀에 대한 배신감으로 자살을 시도하며 혼수상태에 빠져 환상을 보게 된다. 일련의 사건들은 숨 가쁘게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정악상이라고 부르는 중심선율이 전 악장을 관통하면서 곡에 통일성과 균형감을 부여한다. 천재다운 솜씨다.

‘환상교향곡’ 자필 악보. [사진 사회평론]
이 곡을 탄생시킨 불같은 사랑의 대상은 바로 스물여덟 살의 영국 여배우 해리엇 스미스슨이었다. 셰익스피어에 빠져 있던 베를리오즈는 ‘햄릿’을 보러 갔다가 오필리어 역을 연기한 스미스슨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다. 사흘 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으로 분한 그녀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강철 손이 심장을 움켜진 것 같아 숨도 쉴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때부터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불타는 감정을 담은 광적인 러브레터를 계속 보내며 그녀를 2년도 넘게 쫓아 다녔으나 그녀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다 베를리오즈는 스미스슨이 그녀의 매니저와 불륜관계에 있다는 헛소문을 듣고 분노로 들끓었고 그렇게 그녀에 대한 사랑도 식어버렸다.

베를리오즈는 작품 뿐 아니라 연애 역시 늘 격정적이고 낭만적이었다. 이제 베를리오즈의 열정은 19세의 아름다운 피아니스트 마리 모크에게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녀와의 열애는 다시 예상치 못한 장애에 부딪히고 만다. 로마 대상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특전으로 로마 유학길에 오른 베를리오즈. 하지만 결혼을 약속했던 마리가 자기 엄마의 설득에 넘어가 플레엘 피아노 회사와 음악출판사를 모두 상속받은 카미유 플레엘과 결혼할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격분한 나머지 그는 마리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새로운 약혼자 카미유 모두를 살해하겠다며, 독약과 권총을 구입해 급히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긴 여정 중 제 정신이 돌아온 베를리오즈는 복수를 포기하고 로마로 되돌아갔다.

‘환상교향곡’ 주인공이 베를리오즈 자신

로마 생활이 밋밋했는지 예정보다 일찍 정리한 베를리오즈는 파리로 돌아와 귀국연주회를 여는데, 그의 작품들은 파리 문화계의 큰 관심을 끌어 쇼팽, 리스트, 파가니니 같은 음악가들 뿐 아니라 알렉상드르 뒤마, 빅토르 위고, 하인리히 하이네, 테오필 고티에, 조르주 상드와 같은 저명한 문학계 명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놀랍게도 베를리오즈가 그렇게 쫓아다녔던 영국 여배우 스미스슨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열렬한 애정으로 그토록 감동적인 작품이 나왔다는 사실에 심신이 마비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 연주회를 계기로 그녀에 대한 베를리오즈의 열정은 다시 불타올랐고 1년도 안 되어 둘은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배우로서 스미스슨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그녀는 좌절했고 알코올에 빠져들었다. 이제 그녀와의 관계는 시들해졌고 친하게 지냈던 여가수 리치오가 그녀의 자리를 대신했다.

베를리오즈, 그에게 삶과 작품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였다. 그는 불꽃처럼 격렬한 삶을 살고자 했고 정열적으로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창작의 길을 가고자 했다. 한번 사랑에 빠지면 온몸을 내던졌고 곡을 만들 때는 모든 것을 낭만과 열정이라는 용광로에 녹여냈다.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매혹된 상태라야만 살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베를리오즈였다. 그런 그에게 분노와 복수, 열망과 환희는 그의 삶과 예술을 지탱하는 씨줄과 날줄이었다. 근현대의 마지막 낭만주의자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낭만과 열정이 사라진 시대. 타산에 지친 우리가 그를 추억하는 이유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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