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의 기쁨, 되찾은 우측통행의 감격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일제 탄압의 상징 좌측통행
1946년 우측통행 실시
“오는 4월 1일부터 전차, 자동차 같은 승차물은 차도에서는 우측통행이 된다. 러치 군정장관은 12일 기자단 회견 석상에서 이를 언명하였는데, 민주의원에서는 일제시대에 오래전부터 해온 좌측통행을 개정하여 전차, 자동차, 자전거, 마차 등 차도 통행을 우측통행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군정청에서 이에 찬성하여 이를 법령으로 반포하게 된 것이다.”(조선일보, 1946. 3. 13)
1946년 4월 1일, 차량의 우측통행이 전격 실시되었다. 이로써 차량의 좌측통행은 시행 2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총독부가 경찰력을 동원해 강압적으로 좌측통행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민심을 이반시킨 것을 반면교사 삼아 군정청은 이승만, 김규식, 김구 등으로 구성된 자문 기관인 민주의원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우측통행을 입법했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왼쪽 허리에 칼집을 찼고, 좁은 골목길에서 우측통행하다가는 뜻하지 않게 칼집끼리 부딪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 결투 신청으로 오인될 수 있는 그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에도 시대부터 좌측 보행은 ‘사무라이들의 불문율’로 정착되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영국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자동차, 마차, 인력거, 자전거 등으로 좌측통행이 확대되었고, 1900년 경시청령으로 좌측통행이 법제화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수레가 다닐 만큼 넓은 도로가 많지 않았고, 보행자도 법령의 제정이 필요할 만큼 붐비지 않았다. 통행의 우선순위는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위 관리의 말이나 사인교(四人轎·네 명이 메는 가마)가 도로 가운데로 지나가면, 일반 백성들은 도로 가장자리로 피해 가는 식이었다. 관리들의 통행이 많던 종로 큰길을 피해 백성들이 우회하던 뒷골목이 ‘피맛골’(말을 피하는 골목길)로 불리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도로의 통행 방향을 규정한 한국 최초의 법령은 대한제국 경무청령 제2호 가로관리규칙(1905. 12. 30)이었다. 을사늑약(1905. 11. 17) 체결 직후 일본의 내정간섭이 노골화된 시기에 공포된 법령이었음에도, 이 규칙 제6조는 “가로에서 제차(諸車)와 우마(牛馬)가 마주친 때는 서로 우측으로 피하여 양보해야 한다” 하여 일본과는 반대인 ‘우측통행’을 규정했다. 1906년 1월부터 시행된 대한제국의 우측통행은 1910년 강제 합방 이후에도 10년 이상 유지되었다. 총독부는 일본과는 반대인 통행 방향이 불러일으킬 혼란을 모르지 않았지만, 조선에 우측통행을 안착시키기 위해 적극적이었다.
1921년 7월에는 영화관에서 영화 시작 전에 ‘교통안전 우측통행’이라는 공익광고를 상영했다. 8월, 대구경찰서에서는 7절로 구성된 ‘교통선전가’를 선보여 우측통행을 홍보했다. “2. 볼지어다 극히 작은 개미길, 스스로 생겨난 규율 있음을. 우리들은 최귀(最貴)한 사람으로서 어찌하여 버러지만 못할쏘냐. 4. 수저 드는 손을 잊지 말고 우편으로 갈지며(…)”(동아일보, 1921. 8. 3) 9월 30일, 부산에서는 각급 학교 학생 6000여 명이 ‘우(右)’ 자를 쓴 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한 후, 교통순사와 함께 주요 도로에서 행인들을 향해 “오른편으로 가시오”를 외쳤다.
이처럼 1921년 9월 말까지만 해도 우측통행 홍보에 열을 올렸던 총독부는 10월 25일 도로취체규칙을 개정해 11월 1일부터 좌측통행으로 변경한다고 공포했다. “일주일 만에 도로의 통행 방향을 어떻게 바꾸냐”는 반발이 쏟아지자, 총독부는 한 달 후인 12월 1일로 시행을 연기한다고 꼬리를 내렸다. 동아일보는 그 내막을 이렇게 보도했다. “당초 11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원안을 작성하였는데 사이토 총독이 결재할 때 실시 시기가 너무 촉급하여 일반의 주지가 곤란함을 고려하여 ‘십일(十一)월’의 ‘일(一)’ 자에 1획을 가하였다. 담당자는 결재안의 원문을 참고치 않고 예전처럼 소위 ‘맹인(盲人) 결재’거니 하는 요량으로 당초의 기안대로 반포 수속을 행한 것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고.”(1921. 10. 27)
같은 기사에는 강점 이후 11년 동안 우측통행이 유지된 이유에 대한 설명도 들어 있다. “일본 내지의 도로 통행 규정은 전부 좌측통행이다. 그러나 군대에서는 당초에 제정한 규칙이라고 우측으로 통행하여 교통이 복잡한 가로상에서도 대(大)부대의 행군은 일반 규정을 무시하고 행인 마차와 역행하는 것이 기괴한 상례다. 조선에서는 데라우치 총독 시대에 만사를 군대식으로 규율하는 방침하에서 도로 규정을 군대와 동일하게 우측통행으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1910년대 우측통행은 대한제국의 법령 존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일본 군대의 통행 방향을 따랐을 뿐이었다. 우측통행은 헌병 경찰을 동원해 조선을 지배하는 ‘무단 통치’의 산물이었고, 좌측통행이 오히려 소위 ‘문화 통치’의 소산이었다.
하루아침에 우측통행이 좌측통행으로 변경됨에 따라, 불과 두 달 전 ‘우(右)’ 자를 들고 거리 홍보에 나섰던 학생들은 이번에는 ‘좌(左)’ 자를 들고 도로를 헤매고 다녀야 했다. 남대문‧황금정‧남산정 소방대는 선전대를 편성해 이번에는 ‘좌측통행가’를 부르며 시내를 훑고 다녔다. “행보는 문명인의 거동/ 좌측통행은 그의 표징/ 가시오 가시오 좌편으로/ 부디부디 잊지 말고서.” 거리 곳곳에 ‘우측 위험, 좌측 안전’ 푯말이 내걸렸고, 본정경찰서 앞에 거대한 ‘좌측통행탑’이 세워졌다. 전차, 인력거, 우마차, 차량에 ‘좌측통행’ 글씨가 부착되었다. 시행 전후 경기도경찰부에서 뿌린 좌측통행 선전 삐라만 수십만 장에 달했다.
좌측통행은 ‘건전한 국민’과 ‘반(反)국민’을 가르는 가장 기초적인 교통도덕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한국 최초의 네 컷 만화 ‘멍텅구리’에는 멍텅이 일행이 한밤 거리에서 취객에게 “이 연놈들아, 좌측통행이야! 우편으로 가면 구류 처분이다”라고 위협당하는 일화(1925. 3. 11), 순사가 된 멍텅이가 우측통행하다가 아이들에게 “순사가 우측통행한다”고 놀림당하는 일화(1925. 7. 11), 을축년 한강에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육지를 향해 달려가는 뚝섬 피난민들을 향해 순사들이 좌측통행을 부르짖는 일화(1925. 7. 22) 등이 등장한다. 좌측통행은 평범한 서민들이 일상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일본 공권력의 억압이었다.
통행 방향을 규정하는 좌측통행은 기실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문제는 좌측통행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빌미로 사람을 ‘버러지’ 취급한 고지식한 규제와 강압적인 단속에 있었다. 시행 25년 동안, 좌측통행에는 일본 식민 지배에 대한 조선 민중의 상처와 아픔이 각인되었고, 해방 후에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일제의 잔재’로 공감대를 얻었다. 북한은 남한에 앞서 1945년 말 우측통행을 시행했다.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질주한 남북이었지만, ‘좌측통행 폐지’만큼은 남북과 좌우가 한마음이었다.
<참고문헌>
경찰청, ‘도로교통 관련 법령의 변천사’, 경찰청 교통기획담당관실, 2003
이상우, ‘우리나라 자동차는 왜 우측으로 다닐까? 통행 방향의 역사’, 월간 교통, 제288호, 2022
최규진, ‘포스터로 본 일제강점기 전체사’, 서해문집, 2023
황덕수, ‘보행 문화 변천: 우→좌, 다시 우측으로’, 도시문제, 제489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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