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투리처럼 끊어지지 않는 맛, 북한산 밑 그 밀면집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2024. 6. 22. 00:4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밀면
서울 은평구 가야밀냉면해물칼국수의 물밀면.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여름만 되면 냉면 생각이 난다. 이 말은 반 정도만 사실이다. 차가운 면이 먹고 싶지만 그것이 꼭 냉면은 아니다. 이상기후라고 이름 붙여야 납득이 가는 요즘 같은 더위에는 당연히 뜨거운 음식 앞에 앉아 있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메밀이 100%라 순면이니 아니면 80% 비율이니 하는 사설을 늘어놓으며 냉면집 앞에 앉아 있고 싶지는 않다.

대신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밀면집이었다. 사실 부산에 ‘밀면 맛집’이란 게 있지는 않다. 부산이 고향인 후배에게 ‘어느 밀면집을 다녔냐’고 물으니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표정으로 이런 답이 돌아왔다. “집 앞에 있는 중국집 갔어요. 거기서도 밀면 팔거든요.” 부산 사람에게 밀면이란 돼지국밥이나 생선회처럼 ‘집에서 제일 가까운 집’이 맛집이다. 서울 사는 지금,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밀면집이란 게 있을 리 없다. 차가운 음식이야 사방에 널렸지만, 한약재 향이 은근히 깔리면서 밀가루면 특유의 탱글하고 미끈한 물성이 이에 감기는 그 밀면의 맛은 또 다른 무엇으로 대신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그 대신할 수 없는 맛을 얼마 전 서울에서 만났다.

자동차 에어컨을 ‘강’으로 틀어도 시원한 기운이 돌지 않는 날이었다. 혼잣말처럼 “밀면 먹고 싶다”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조수석에 앉아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던 형이 말했다. “북한산 밀면집 가봤나?” 서울 산기슭에는 백숙이나 닭볶음탕 같은 것만 파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일단 가봐라.” 형의 대답은 간단했다. 서울에서 파는 부산 음식은 기대가 별로 없었다. ‘시원하긴 하겠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액셀을 밟았다. 구파발역에서 창릉천을 따라 오른쪽으로 길을 잡았다. 북한산성상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바로 앞에 ‘가야밀냉면해물칼국수’가 보였다. 그 간판 아래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한 무더기 모여 있었다.

가야밀냉면해물칼국수.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곧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니 옛날 내가 생각하던 밀면집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부산에서 잘되는 밀면집이란 보통 ‘시장바닥’이란 말로 묘사할 수 있는, 그러니까 누가 손님이고 종업원인지 구별할 수 없고 누가 화를 내고 누가 응대를 하는지 구분할 수 없는 부산 특유의 무질서한 질서, 그 혼돈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 집은 우선 환하고 깨끗했으며 종업원들이 음식을 테이블에 올려놓을 때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문을 확인했다. 손님이 밀려들었지만, 종업원들의 움직임에 안정감이 있었고 음식 또한 늦지 않았다.

살얼음이 낀 국물에 빨간 다대기 양념과 돼지 편육, 삶은 달걀, 그리고 깨를 뿌렸다. 국물에는 얇게 썬 토마토와 오이채도 보였다. 대접을 두 손으로 붙잡고 국물을 마셨다. 평양냉면의 묵직한 감칠맛과 다른 결의 맛이 펼쳐졌다. 시큼하고 달콤하며 영도 다리 밑 한약재 거리를 지나가는 것처럼 뭉근하게 펼쳐지는 당귀와 감초의 향은 그 어느 음식도 아닌 오직 밀면이었다. 본래 부산에 내려온 피란민들이 소나 닭 대신 돼지로 육수를 내며 그 냄새를 잡으려고 어쩔 수 없이 넣던 한약재였다. 그 개성 강한 향과 맛은 자유롭게 뛰어노는 듯했지만, 맛에 고삐가 단단히 채워져 어느 이상 튀어 나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불어오는 바람을 하나로 만들어 추진력을 얻는 범선처럼 이 집 밀면은 산만하지 않고 집중된 맛을 지니고 있었다. 입안에서 상앗빛의 미끈한 밀가루 면이 춤을 추듯 꿈틀거리고 그 밑에 넘실대는 국물은 천연색으로 빛이 났다. 대접이 아니라 대야라고 할 만한 해물칼국수는 동죽과 바지락이 가득 들어가 조개 특유의 꼬릿하면서도 달달하고 시원한 국물이 무한한 대양처럼 너르게 펼쳐졌다.

튀기듯 구워낸 해물파전도 웬만한 라지 사이즈 피자만 했다. 반죽 안에 들어간 파와 오징어, 양파 같은 채소들을 입속에 넣으니 땅에서 뽑아낸 순한 단맛이 길게 이어졌다. 바삭바삭한 겉과 촉촉한 속, 이 상투적인 말을 피해 나갈 수 없는 식감은 거부하기 어려워 배가 부르다고 하소연하면서도 한 젓가락이 또 아쉬웠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예전처럼 향수병이 걸린 것처럼 생각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추억 속 음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과거의 맛이라고 하기엔 지금도 발끝에서부터 지릿지릿하게 맛이 타고 올라온다.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게 된다. 부산이란, 여름 밀면의 맛이란 술만 마시면 튀어나오는 사투리처럼 끊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다.

#가야밀냉면해물칼국수: 물/비빔밀면 1만원, 해물손칼국수 1만원, 해물파전 1만6000원.

서울 은평구 가야밀냉면해물칼국수의 물밀면.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