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시발점은 유럽 포성이 아닌 만주사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새로운 시각
피와 폐허(전 2권)
리처드 오버리 지음 |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총 1474쪽 | 총 7만6000원
1931년 9월 18일 이른 아침, 만주에 주둔해 있던 일본 관동군의 공병 부대가 선로에 폭탄을 설치했다. 유조구(柳條溝·류탸오거우)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 세계 전체로 놓고 보면 그다지 큰 일이 아니었으나 향후 파장은 엄청났다. 이 조작 사건을 구실로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는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그것은 중·일 전면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 엑서터 대학 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저자 리처드 오버리는 ‘그날’의 의미를 더 강조한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날이라는 것이다. 2차 대전은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난 전 지구적 분쟁이라는 폭넓은 시각을 제시해,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1937년 중일전쟁까지도 대전(大戰)의 일부로 삼았다. 21세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머나먼 한반도의 긴장에 영향을 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1930년대와 1940년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나라들의 국지전이 세계대전으로 번지는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그런데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고 여긴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껏 2차 대전 발발일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1일이라고 얘기된 것 아니었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전에 이미 아시아는 전화(戰禍)에 휩싸였는데, 서양 학자들은 유럽에서 포성이 들려야 전쟁으로 여기는 서구중심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저자 오버리의 시각은 그런 관점보다 더 범위가 넓은 역사적 재해석을 제시한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2차 대전은 유럽 국가들 사이의 분쟁으로 시작됐으며, 서쪽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영국·미국이 동쪽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과 연합해 파시즘 추축국인 독일·이탈리아·일본과 대적한 전쟁이었다고 봤다.
오버리 관점은 분쟁의 핵심에 ‘영토제국(領土帝國)’의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국의 개념은 황제가 다스리는 큰 나라라는 뜻이 아니다. 본국과 세계 도처에 산재한 식민지, 보호령, 수출입항, 조약상 특권 영역 등으로 이뤄진 광범위한 국가라는 것이다. 본국 국민이 시민(市民)이었다면 식민지 백성은 신민(臣民)으로 차별했고, 식민지는 본국에 원자재와 노동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2차 대전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구(舊)제국’과 새롭게 영토제국의 물결을 일으킨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라는 ‘신(新)제국’ 사이의 충돌이었다. 후발 3국이 제국 형성에 필사적이었던 것은 ‘민족의 존속에 필요한 생존 공간’이 있어야 ‘구제국’에 밀리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추축 3국이 전쟁에서 가장 얻고자 한 것은 식민지였다. 개전 이후 패전을 거듭한 이탈리아는 독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발칸반도의 일부를 점령했다. 일본은 영국·프랑스·네덜란드 제국의 본국이 독일군에 당하고 있던 빈틈을 파고들어 동남아를 침략했다. 그렇다면 독일은? 그들은 ‘동방’에 대한 뿌리 깊은 환상이 있었고, 러시아를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의 땅이라 여겼다. 히틀러는 러시아인을 ‘붉은 인디언’이라 부르며 독일인을 이주시켜 ‘지배하고 관리하고 착취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서유럽 점령에서 멈추지 않고 방향을 바꿔 소련을 침공했으며, 마침내 그곳에서 발목을 잡힌 결과 전세가 뒤집어졌다.
2차 대전은 결국 세계의 제국주의를 끝장낸 ‘마지막 제국주의 전쟁’이 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 중 일부가 한동안 즐겨 썼던 ‘미제(美帝)’라는 말은 대단히 어색한 용어가 된다. 책의 제목(원제 Blood and Ruins)은 1928년 정치경제학자 레너드 울프가 제국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며 ‘유일한 문제는 제국주의가 평화롭게 묻힐지 아니면 피와 폐허 속에 묻힐지 여부다’라고 쓴 데서 따왔다. 필경 피와 폐허 속에 묻혀버린 제국주의 위에 과거 식민지였던 숱한 민족국가들이 1945년 이후 출현한 셈이다.
2021년 처음 출간돼 ‘2차 대전의 새로운 표준 저작’이란 찬사를 받은 이 책은 방대한 전사(戰史)뿐 아니라 분량에 걸쳐 총력전과 전쟁경제, 전쟁범죄와 민간 전쟁 등 2차 대전의 여러 방면을 자세히 서술했다. 2차 대전은 ‘전장의 전투원과 후방 민간인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 총력전’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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