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픈 사람 없는 것보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낫다
[박준의 마음 쓰기] (6)
단아한 차림의 한 어르신이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저는 머리 숙여 인사부터 했습니다. 다만 도통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어쩌면 복잡한 장례식장의 호실을 잘못 찾아온 분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머뭇거리는 사이, 어르신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네가 준이구나. 나는 돌아가신 네 아버지의 이종사촌 누이야. 아주 어려서 한번 보았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네.” 조문을 마친 어르신을 모시고 차를 한 잔 마셨습니다. ‘진외가 이당고모’라 불러야 하겠지만 이 호칭 역시 예상 못한 만남만큼이나 참 낯선 것이었습니다.
어르신은 제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좋아하며 따랐던 당신의 이모. 여리고 순한 성품을 가졌고 음식 솜씨가 빼어났다고. 특히 부엉이의 긴 날개깃을 요리 솔처럼 삼아 김에 들기름을 재어가며 화로에 구워주곤 했는데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이내 어르신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폐와 기관지에 병이 있었다지만 그래도 너무 이르게 떠난 것이 원통하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살면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제 할머니가 조금은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할머니 이야기가 생소한 까닭은 제 아버지에게는 엄마의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엄마의 얼굴을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세 살이 되던 해에 엄마를 잃었고 6·25전쟁을 지나는 동안 몇 장 되지 않았던 사진들마저 모두 사라졌다 합니다.
평생 건설 현장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큰비가 오면 며칠씩 일을 쉬었습니다. 그럴 때면 이따금 방에 앉아 “엄마 보고 싶다” 하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와 큰 허물없이 지내던 저는 “엄마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면 엄마가 보고 싶어?” 하고 농을 던졌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설렁탕 맛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문득 ‘아, 오늘 설렁탕 먹고 싶다’ 하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중학생이던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먼 친척 집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계시던 한 어른이 저와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이어 꺼내 보인 사진 한 장. 작은 흑백사진 속에는 경사를 맞이한 일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어른은 숱한 사람들 가운데 한 얼굴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게 네 엄마야” 하고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시집가기 전 할머니의 앳된 모습이 손톱만 한 크기로 찍혀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진을 빌려와 확대하고 또 확대했고 그 끝에 결국 할머니의 얼굴을 흐릿하게나마 액자 속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늘 그 액자를 침대 머리맡에 세워두었고요. 비로소 그리움이 선명해진 것입니다.
사랑의 실연이든 목표의 실패든 삶을 살다 보면 커다란 상실의 감정이 나를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혹은 무엇을 위해 노력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닿지 않았던 인연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당초 꿈꾸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스스로의 시간을 송두리째 부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처음부터 아니 있었어도 좋을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별과 끝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만나고 새로운 꿈을 꾸었다는 가장 선명한 증거가 되어주는 것이니까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리하여 사무치게 그리운 누군가의 또렷한 얼굴을 마음에 품고 사는 이는 보고 싶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이보다 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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