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파랑의 사연

2024. 6. 22.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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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VEIL’ 시리즈 중 ‘a slip with a chair’. 2008년 ⓒ 임안나
색은 흰색과 파랑 두 가지다. 흰 공간에는 몇 개의 사물이 놓여 있다. 바람이 부는지 옷걸이에 걸린 얇은 슬립이 날리고, 아랫단이 파랗게 물든 슬립에선 뚝뚝뚝 잉크 같은 파란 물이 떨어진다. 의자는 꼼짝하지 않겠다는 듯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는데, 구두는 곧 어디론가 떠날 것 같이 걸음의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제가 신었다가, 그렇게 벗어두고 몸만 빠져나왔어요.”

기법적으로는 ‘메이킹 포토’ 같지만, 또 사진이 발표된 2008년은 이미 포토샵에 기반 한 메이킹 포토가 일반화된 시절이지만, 작가가 직접 구두를 신고 벗은 것처럼 철저히 아날로그로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우선 흥미롭다. 실재하는 공간의 배경을 모두 흰색으로 칠하고 실재 사물들을 하나하나 배열했다. 빨랫줄은 사진의 화면 밖 이쪽저쪽의 기둥에 매어졌고, 그 사이에서 선풍기가 돌아가는 식이다. 상업사진가로 활발히 활동했지만 늘 창작을 갈급했던 사진가가, 머릿속에서 상상한 이미지를 스케치하고 이를 익숙한 직업적 기법으로 세팅해 촬영함으로써 자신만의 ‘화법’을 만든 것이다. 그것이 사진가 임안나의 초기 대표작 ‘WHITE VEIL(화이트 베일)’ 시리즈고, 이 사진은 그 중 하나인 ‘a slip with a chair’다.

작가는 “보이는 사물들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몇 개의 사물들로 모노드라마 같은 심리적 장면을 구성한 ‘WHITE VEIL’은 익숙하고 흔한 대상들을 미니멀하게 찍었지만, 풍부한 연상과 몽환적인 세계를 펼쳐 보임으로써 ‘차가운 영웅’에서부터 ‘불안의 리허설’에 이르기까지 이후 이어진 ‘사진가 임안나’의 데뚝한 행보에 첫 정점을 찍었다.

가리기도 하지만, 가림으로써 더 드러내는 방식인 베일의 양가적인 특성은 사진과 잘 어울린다. 사진평론가 박영택은 파랑을 두고 ‘사물들과 관계를 가지고 난 후 남겨진 지문, 체취, 체액, 땀이나 타액 같은 것이고 여운이자 아련하고 덧없고 서글픔 같은 것들이다’라고 상정했는데, 이로써 모노드라마는 더욱 드라마틱해진다.

현실의 공간 어딘가 이 사진 곁에서, 파랑의 사연을 상상하며 여름을 지나고 싶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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