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저예요” 강신술사에 키스했다…죽어서도 잊지 못한 사랑, 대체 무슨 일이[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티소 편]
<동행하는 작품>
공원 벤치
지나가는 폭풍우
꿈꾸는 소녀 동행하는>
계절의 향기가 넘실대는 오후.
한 여성이 세 꼬마에게 둘러싸인 채 행복에 젖어있다. 캐슬린 뉴턴. 리본을 얹은 우아한 모자와 꽃밭을 옮겨담은 원피스를 챙긴 여인 이름이다. 앙증맞은 화사함을 품은 그녀는 아이들의 따뜻한 어머니 역할을 다할 게 분명하다. 미소 띤 그녀가 보는 이는 아들 세실이다. 큼직한 단추가 매력적인 정장을 입은 꼬마는 화폭 밖을 당당히 응시하고 있다. 꼿꼿이 등을 편 녀석은 훗날 목소리도 쩌렁한 신사로 자랄 것이다. 뉴턴 등에 기대 온기를 만끽하는 아이는 딸 뮤리엘이다. 어머니와 같은 꽃무늬, 특히 층층이 주름진 밑단이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이 소녀도 곧 사교계에 데뷔해 매력을 드러낼 것이다. 한 뼘 뒤에서 수줍게 미소 짓는 아이는 뉴턴의 조카 릴리안이다. 가지런히 정돈한 머리칼, 목덜미와 소매 끝 흰 프릴이 달린 원피스가 매력적이다. 수줍게 미소 짓는 이 숙녀 또한 이곳 모두와 한지붕 가족인 양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한 모습이다.
온화한 날씨와 화사한 배경, 벤치 위 화려한 양탄자 등 모든 게 이들의 행복을 암시한다. 가만히 보다보면 서로를 향한 애정 어린 속삭임도 들리는 듯하다. 누구든 한 번은 꿈꿀 만한 아름다운 가족상이 담긴 그림이다.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가 아내와 자식, 조카를 담은 작품인 〈공원 벤치〉다.
하지만 정작 티소는 이를 그릴 때 심장이 찢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자꾸만 맺히는 눈물이 물감에 번지지 않도록 연신 닦고 훔쳤다. 티소는 이 그림을 전시회에서는 공개하는 한편, 누가 어떤 값을 부른들 결코 판매대에 올리지 않았다. 그는 남은 생 동안 〈공원 벤치〉를 늘 곁에 두고 바라만 봤다. 죽는 그 순간에도 이 작품을 꺼내보고, 눈물 짓고, 다시 살펴보고, 그러다 또 울며 화폭을 향해 손을 뻗었다고 한다. 무슨 사연일까. 이것은 한 화가의 찰나같고 찬란했던 사랑 이야기다.
제임스 티소는 1836년 프랑스 낭트에서 포목상(布木商) 아버지와 모자 가게에서 일한 어머니 사이 태어났다.
티소는 가업을 따르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친 채 화가 꿈을 키웠다. 스무 살이 된 1856년, 티소는 파리에 있는 에콜 데 보자르(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독보적 데생 실력을 갖춘 도미니크 앵그르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 덕에 곧 사진 같은 섬세한 묘사를 주특기로 둘 수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곁에서 본 여러 옷의 특징을 기억한 덕인지, 특히 의상에 대한 표현만큼은 훗날 사료(史料)로 인정받을 만큼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곧잘 소화한 티소는 쟁쟁한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스물 세 살에 살롱전(展)에 입상했다. 이로써 그는 자기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티소의 가장 유명한 초기작이자 생을 관통하는 대표작은 인화한 듯 선명한 1864년 그림 〈L.L. 양의 초상화(빨간 상의를 입은 소녀)〉다. 이 새초롬한 여성의 매력은 활짝 핀 장미만큼 진한 붉은 머리띠와 방울 자켓 덕에 더욱 짙어진다. 그녀가 의외의 순수하고도 발랄한 면이 있다는 건 별 모양 목걸이와 풍성한 치마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사적인 취향이 버무려진 어두운 녹색 꽃 벽지와 바닥, 대충 쌓여있는 책 등은 지금 은밀한 공간, 이를테면 그녀의 개인 방에 와있는 듯한 착각도 들게끔 한다. 색채든, 구성이든 누구나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티소는 이렇듯 예쁘고 우아한 여성을 세밀하게 그리는 데 집중했다. 많이 그려서 잘 그릴 수 있었는지, 잘 그려서 많이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화폭에서 해사하지 않은 여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시절 예쁜 여성 그림을 즐겨그린 화가가 으레 그랬듯, 티소 또한 주체할 수 없는 활력의 소유자였다.
무난히 명성을 쌓아올리던 티소는 1870년에 돌연 보불(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했다. 1년 뒤 무사히 돌아와선 파리 시민과 노동자가 세운 자치정부 파리 코뮌에도 가담했다. 그러나 코뮌 정부는 프랑스 정규군 등에 의해 2개월여만에 급속도로 붕괴했고, 졸지에 체포 위기에 처한 티소는 파리를 떠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런 그가 망명지로 택해 밟은 땅이 영국 런던이었다. 1871년의 어느 날이었다. 티소는 몰랐다. 이 낯선 곳에서 지금껏 스쳐간 어떤 이보다 아름다운 여성을 만날 줄은. 그리고, 그 사람과 한여름밤의 꿈같은 사랑을 하게 될 줄은.
티소에게 사랑의 열병을 안겨준 뉴턴은 1854년 인도 아그라에서 출생한 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다.
공무원 아버지가 인도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었기에 그곳에서 세상 빛을 본 것이었다. 당시 인도가 사실상 영국 손아귀에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가운데 1857년, 인도 내 인도인 용병(Sepoy)을 중심으로 반영(反英)을 기치로 건 이른바 세포이 항쟁이 발발했다. 그 여파로 인도에 터를 잡은 영국인, 특히 여성과 어린이 상당수가 본국으로 피신하듯 돌아갔다. 아직 글도 다 익히지 못한 어린 뉴턴 또한 대열에 합류해야 했다. 런던에 온 뉴턴은 의사인 삼촌 밑에서 컸다. 수녀원 학교에서 맞는 잔잔한 아침이 이어졌다.
"네 결혼 상대를 찾았으니 인도에서 직접 만나보길 바란다."뉴턴은 16세를 맞은 해, 아버지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가 다시 인도행 배에 오른 이유였다. 이 일의 단추가 끝까지 잘 끼워졌다면, 뉴턴은 훗날 티소란 사람의 존재조차 모른 채 평생 요조숙녀로 살 수도 있었다.
모처럼 자유를 맞은 사춘기 소녀는 들떴다. 그리고, 기구한 인생의 굴레는 여기서부터 고개를 들었다.
뉴턴은 그녀가 품은 설렘의 감정을 같은 배에 탄 한 사람에게 쏟고 말았다. 그녀는 선상에서 처음 본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 이름은 팰리서였다. 영국 왕실 해군 소속의 그는 각진 얼굴과 다부진 체형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뉴턴은 육지에 닿기 전 이 사내와 사랑까지 나눠버렸다. 인도에 도착해선 아버지와 예비 신랑에게 사실을 숨긴 채 결혼식을 올렸다. 죄책감에 시달린 뉴턴은 얼마 안 가 남편에게 그 시절을 고백했고, 결국 이를 계기로 이혼을 당했다. 임신 상태로 17살 이혼녀가 된 뉴턴은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야 했다. 배 위 낯선 남성의 핏줄일 것으로 추정되는 딸 뮤리엘을 낳은 그녀는, 언니 집에 얹혀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또한 1871년께 어느 날이었다. 뉴턴은 이대로 스러지듯 살아야할까 싶었다. 티소, 프랑스 억양이 다분한 이 남성을 만나기 전까지는.
런던에 자리 잡은 티소는 1872년 한 해 그림으로만 웬만한 상류층 이상 수입을 올렸다.
실제로 그는 단 2년만에 당시 최고급 주택가인 세인트 존스 우드의 저택을 사들이는 등 승승장구했다. 특히 런던 귀부인들이 티소의 우아한 그림을 좋아했다. 귀부인 대부분이 티소 앞에 서는 걸 '버킷리스트'로 여겼다는 말도 있다. 티소 그 자신도 작품 홍보와 판매에 대한 수완이 탁월해, 동료 화가 존 싱어 사전트는 그에 대해 "천재적인 딜러"라고 말할 정도였다.
티소는 이 무렵 〈선상 무도회〉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당시 상류층 영국인에게 배 위 파티나 무도회는 흔한 일상이었다. 티소가 화폭에 옮겨담은 여성은 제각각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하나같이 기품있고 화려한 모습을 보인다. 빅토리아 시대에 걸맞는 사치스러운 옷과 소품을 정교하게 묘사한 덕에 현장감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주연처럼 표현된 몇몇 여성의 경우, 이 작품을 현관에 걸어두면 오다가다 흐뭇한 기분을 충전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티소가 1876년쯤부터는 한 여인만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그녀가 바로 뉴턴이었다. 티소와 뉴턴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 마주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해 티소가 우연히 그의 집 앞을 지나가는 뉴턴을 봤고, 곧장 첫눈에 반해선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대시'를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티소는 뉴턴의 기구한 과거를 모두 품었다. 뉴턴 또한 티소의 격정적인 면을 보듬었다. 마흔 살의 외국인 남자, 사생아 아이를 둔 스물 두 살 여자는 오직 사람 대 사람으로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은 남들에겐 아름다운 로맨스로 비춰지지 않았다. 추잡한 스캔들로 보여질 뿐이었다. 당시 분위기가 그랬다. 우선 열여덟 살 차이가 나는 남녀의 교제를 마냥 축복할 수는 없었다. 또, 그 시절 사회는 이혼녀를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젊은 나이에 이혼 당한, 그 사이에 사생아까지 둔 여인이라면…. 런던에선 사실상 없는 사람과 다를 게 없는 대우를 받아야 했다. 티소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뉴턴과 동거를 시작했다. 뉴턴은 곧 아들 세실을 낳았다. 티소의 아들이 맞는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가 아이의 아버지라는 데 대해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티소는 급속도로 추락했다. 돈을 쓸어담던 화가에서 소문이 아주 좋지 않은 어린 여성과 교제하는 파렴치한으로 전락해야 했다.
티소는 어느새 사교계에서 '왕따'로 몰렸다.
물밀듯 밀려오던 그림 의뢰는 뚝 끊겼고, 여러 중요한 행사에는 초대장조차 받지 못했다. 티소는 이를 담담하게 수용했다.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 얼마간 작품을 내지 않는 것으로 나름의 아쉬움을 표할 뿐이었다. 티소는 과거 화가의 길에 올랐을 때 그랬듯, 이번에도 자기가 고른 길을 믿었다. 그림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기에 뉴턴을 더 자주 그릴 수 있었다. 초대장이 오지 않았기에 뉴턴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둘은 그 기간 달콤한 사랑을 했다.
두 사람 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향유했다. 티소가 연인 뉴턴을 그린 첫 그림은 〈지나가는 폭풍우〉로 알려져 있다. 두꺼운 원피스를 입은 해말간 여인이 의자에 살포시 기댄 채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 뉴턴이다. 반면, 검은 외투에 조끼까지 차려입은 사내는 굳이 밖으로 나가 무언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쓰고 있다. 이는 티소일 것이다. 티소는 이처럼 사랑싸움의 장면을 담은 그림에서조차 뉴턴을 한껏 사랑스럽게 그렸다. 등을 돌리기는커녕 외려 방 쪽으로 시선을 둔 그, 먹구름 틈으로 차츰 짙어지는 빛은 이번 냉전이 곧 끝날 걸 암시한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잠깐 토라졌던 티소는 이 작품을 뉴턴에게 슬며시 선물처럼 건넸을지도 모른다. 그땐 내가 미안했어…라며. 뉴턴은 이에 활짝 웃으며 그를 끌어 안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티소는 뉴턴와 함께 한 매순간을 기록하고 싶었는지, 그녀의 초상화를 계절별로 따로 그리기도 했다.
이 가운데 대표작은 〈7월〉과 〈10월〉이 꼽힌다. 〈7월〉 속 뉴턴은 노란 리본으로 포인트를 준 풍성한 프릴 장식의 얇은 흰옷을 입고 있다. 나른한 얼굴의 그녀 뒤편에는 해변이 깔려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올 바닷바람이 방 안 뜨거운 공기를 식혀줄 듯하다. 〈10월〉에선 어느덧 가을을 맞이하는 뉴턴이 두께감 있는 옷을 걸친 채 나무와 낙엽 사이를 걷는다. 풍성한 털의 둥근 챙모자, 유광 무늬와 플리츠 소매가 돋보이는 외투, 프릴과 레이스로 화려하게 꾸며진 캉캉치마, 적당한 굽의 키튼힐 앵클 부츠 등 어느 곳 하나 허투루 그린 데가 없다. 늘 새롭게, 매번 생생하게. 이는 티소가 뉴턴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손가락질을 이겨내고 함께 오래도록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새드엔딩이 기다리고 있었다.
티소가 마흔 넷, 뉴턴이 고작 스물 여섯살이 된 1880년쯤부터 둘의 관계에 두꺼운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사실 뉴턴은 티소를 알게된 즈음부터 수시로 기침을 하고, 종종 이유 없이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때때로는 꼼짝도 못한 채 누워있어야 할 만큼 고통이 심해지곤 했는데, 이게 알고보니 결핵의 전조 증상이었다. 이 병은 매 해 그녀를 야금야금 좀먹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은 소소한 일상 생활조차 가로막을 만큼 덩치를 키운 것이었다.
티소의 〈꿈꾸는 소녀〉는 그날 따라 갑자기 상태가 악화해 의자에 파묻히듯 기댄 뉴턴을 그린 그림이었다. 화폭 속 뉴턴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공허한 눈빛과 눈가에 드리워진 어둠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얕고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을 터였다. 분홍빛의 발랄한 옷 또한 지금만큼은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는 모습이다. 티소의 뉴턴 그림 상당수의 배경이 정원인 점 또한 사실은 그녀가 일광욕과 신선한 공기를 처방으로 받은 데 따른 것이었다.
"몸은 좀 어떠오?"
"너무 좋아요. 오늘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워요."
1882년의 어느 날. 티소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뉴턴의 말에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병 간호에 여념없는 티소도, 어느덧 죽음의 기운이 짙게 깔린 뉴턴도 서로를 위해 애쓰는 나날들이었다.
"간만에 공원 산책을 할 수 있겠소? 따뜻한 햇살과 활짝 핀 꽃향기가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말이오." "물론이죠. 오랜만에 예쁘게 차려입고 가야겠어요. 뮤리엘과 세실, 조카 릴리안도 깔끔하게 입혀야겠고요."
티소의 제안에 뉴턴은 잔디밭을 찾은 토끼처럼 씩씩하게 움직였다. 오늘은 신이 허락한 날일까. 아니면, 이렇게 조금씩 회복할 수 있는 걸까. 티소는 이들이 준비하는 동안 조용히 화구를 챙겼다. 공원으로 나선 이들은 꽃밭 앞에 놓인 벤치를 발견했고, 그곳에서 잠깐 한숨을 돌렸다. 콧노래를 흥얼이는 뉴턴, 그런 뉴턴에 매달려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들…. 티소는 이 모습에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오늘 같은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수 있다는 데 티소는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이날부터 작업을 시작한 게 〈공원 벤치〉였다. 다만, 뉴턴을 오랜 시간 모델로 둘 수 없었기에 어느정도 밑그림만 칠하고 놔둔 상태였다. 티소는 건강해진 뉴턴을 앞에 둔 채 이 그림을 두고두고 그릴 수 있기를 염원했다.
하지만 희망을 본 그 해 11월, 뉴턴은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다.
티소는 그날도 숨이 차츰 잦아드는 뉴턴을 품에 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 꼬박 나흘 간 그녀의 관을 지켰고, 묻기 직전에는 그 위에 보라색 벨벳을 덮은 후 울며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하늘에 있는 누가 됐든, 상처 많은 그녀의 혼을 잘 보듬어달라고.
티소는 뉴턴의 흔적을 견디지 못했다.
"사실은 티소가 뉴턴에게 집착해 방에 감금한 것이었다", "티소가 이별을 말할 것을 두려워한 뉴턴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등 지독한 소문 또한 참을 수 없었다.
티소는 뉴턴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안 돼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계속 사교계의 풍경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그녀와 함께일 때 세상은 온통 유채색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잃은 후 세상에는 오직 무채색의 풍경밖에 없었다.
예컨대 티소가 뉴턴과 함께일 때 그린 〈무도회〉와 그녀가 사라진 후 작업한 〈야망 있는 여인〉을 비교하면 당시 심경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사실상 같은 구성의 이 그림은 확실히 비슷하지만, 또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전자의 그림에는 기품있는 부인, 후자의 그림에는 무언가 딴 생각이 있는 듯 묘하게 웃고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지금의 짝보다 자신을 더 높은 곳에 데려다줄 수 있는 파트너를 물색하는 듯도 해보인다. 이처럼 진실한 사랑의 상실은 세상을 보는 눈마저 부정적으로 바꿔버렸다.
티소는 뉴턴이 죽고서 3년 후인 1885년에야 〈공원 벤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옆을 돌아보면 뉴턴이 대체 무슨 일이냐며 얼굴을 어루만져줄 듯했고, 뒤를 돌아보면 뉴턴이 왜 우느냐며 안아줄 듯했다. 물론 티소는 뉴턴 이후에도 다른 여성을 모델로 그림 작업을 하고, 누군가와는 결혼을 생각할 만큼 가깝게 사귀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도 뉴턴의 빈자리는 대신할 수 없었다. 이는 티소가 강신술 모임에까지 참석해 그녀를 만나려고 한 부분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어니스트'라고 불린 술사가 뉴턴의 영을 불렀으며, 그의 도움으로 티소는 죽은 뉴턴의 손을 잡고 입맞춤까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 모임의 주도자는 사기꾼에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말년을 맞은 티소는 때때로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순례길에 오르는 등 종교 생활에 전념했다.
그는 죽기 전까지 17년 가까이 은둔 생활을 했다. 그동안 더는 사교계의 시끌벅적한 풍경을 그리지 않고, 성경 내용을 중심으로 한 종교화 작업에만 몰두했다. 이 무렵 대표작은 〈천사들의 보살핌을 받는 예수〉 등이다. 종교화 특유의 경건함을 살리는 한편, 이번에도 예수의 새하얀 옷 곳곳의 디테일을 놓곤 신경을 쏟은 모습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대로 두문불출을 이어가던 티소는 1902년에 사망했다. 눈부신 성공과 뜨거운 사랑, 끝모를 따돌림과 상실의 세월을 겪은 그가 하늘에선 진짜 뉴턴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번에는 눈부신 천사의 옷을 입은 그녀를 그릴 수 있었을까.
〈참고자료〉
그리다, 너를, 이주헌, 아트북스
James Tissot, Grillet, Thierry, Koenemann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지금도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가끔 역사, 문학 등과 관련한 특별전도 선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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