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美에서 ‘젊은 보수’가 크는 법
미 청년 보수 단체 ‘터닝포인트 USA’ 설립자 찰리 커크가 연단에 서자 만 명에 가까운 관중들이 환호했다. 지난 15일 대선 경합주 미시간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이 단체 행사 참석자 상당수는 20~30대 청년층이었다. 커크 자신도 서른이다. 다른 지역 보수 집회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다.
보수가 쿨하다는 말을 한국에서 들을 수 있을까. 이날 행사장은 철저히 Z세대(1990~2000년 출생)를 겨냥해 디자인됐다. 자유, 표현의 보장, 시장 경제 등 보수의 근본 이념을 상징하는 문구가 새겨진 포스터와 배지 등 세련된 ‘굿즈(상품)’들이 진열됐다. ‘사회주의자 남자 친구와 헤어져라’ ‘검열당하려고 학교에 수업료 냈나’ 등 눈에 쏙 들어오는 문구를 본 2030들이 흥미롭다는 듯 챙겨갔다. 이날 행사장 곳곳엔 최신 힙합·록 음악이 울려퍼졌다. 본격 정치 행사였지만 참석자들은 힙한 분위기를 즐겼다.
커크는 열아홉 살에 이 단체를 만들었다. 좌파 성향 일색인 학교 캠퍼스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현실에 ‘분개한다’며 나섰다. 미 전역 고등학교·대학교를 돌면서 뜻 맞는 학생들을 끌어모았다. 전국 캠퍼스에 진을 치고 남녀 갈등, 성 정체성, 정치 이념 등을 주제로 민주당 지지자들과 격렬하게 토론했다. 이들을 논파하는 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려 거대한 팬덤을 형성했다.
미 보수 진영은 커크의 가치를 알아봤다. 케빈 매카시 전 하원의장 같은 정치 거물이 갓 스무 살이 된 그의 행사에 참석해 연설했다. 자신도 대학생 때 학생 연합을 조직해봤던 매카시는 ‘청년 보수주의자’를 발굴해놓지 않으면 공화당의 미래는 없다고 믿었다. 대형 인테리어 제품 체인점 홈 디포의 버나드 마커스 등 부호들도 잇따라 거금을 쾌척했다.
불과 10여 년 만에 이 단체는 미 전역 75만명의 청년 회원을 동원하는 초대형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번 대선에선 최대 격전지인 미시간·애리조나·위스콘신 등 3개 경합주에 수천만달러를 쏟아부으면서 유권자 등록 운동을 벌이고 있다. 바이든과 불과 1~2%포인트 차이로 경쟁하고 있는 트럼프 진영이 이 청년 단체에 매달리고 있다. 젊은 정치인들을 ‘들러리’로 소비하는 한국 정치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단체가 트럼프 극단주의로 기울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날 행사는 젊은 층이 결집하면 기성 정치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한국에서도 여당의 총선 참패 이후 ‘젊은 보수’를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또 나온다. 선거철마다 나왔다가 이내 사라지는 반짝 이슈다. 반면 풀뿌리 청년 정치의 중요성을 내다본 미 보수 진영은 청년들에게 이렇게 ‘장기 투자’를 해왔다. 이제 그들은 과실을 거두려 하고 있다. 이 정도 고민이나 노력 없이 젊은 층 표심(票心)을 얻겠다고 하는 건 과욕이다. 한국 정치권은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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