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호혈 6걸 없었다면 공산당 궤멸, 중국사 달라졌을 것"

2024. 6. 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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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선, 정보전쟁] 중국 국공기의 정보전〈중〉
용담호혈(龍潭虎穴)은 용이 사는 연못과 호랑이가 사는 굴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의 국공내전 시기에는 공산당이 국민당의 정보기관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용과 호랑이만큼 국민당 정보기관이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용과 호랑이 굴로 뛰어들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이들을 ‘용담호혈 영웅’이라 불렀다. 국민당 정보기관에 직접 침투한 공산당 첸좡페이(錢壯飛), 리커눙(李克農), 후디(胡底)를 용담호혈 전삼걸(前三傑)이라 불렀고, 국민당 군(軍)에 침투한 슝샹후이(熊向暉), 천중징(陳忠經), 선젠(申健)을 후삼걸(後三傑)이라 불렀다.

중국은 이들의 활동이 중국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며 소설·드라마 등을 통해 국민에게도 알리고 있다. 그래서 시진핑 주석이 즐겨 보았다는 암산(暗算), 풍쟁(風箏)을 비롯 잠복(潛伏), 북평무전사(北平無戰事), 위장자(僞裝者), 마작(麻雀) 등 숱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격랑의 역사 속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스파이 영웅들의 이야기를 잘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 평가가 과언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저우, 전삼걸 3명에게 정보전 전권

후삼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슝샹후이(오른쪽)와 중국 공산당 초기 정보전을 지휘한 저우언라이. 후삼걸은 국민당 군에 위장 침투해 스파이 활동을 한 3인을 일컫는 말이다. [사진 김명호]
국민당 정보조직인 당무조사부 책임자 쉬언쩡(徐恩曾)의 비서로 침투한 췐좡페이는 1931년 4월 24일 하루 종일 비밀전문을 처리하고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긴급전문이 갑자기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도 모두 쉬언쩡만 보라는 친전이었다. 극비임을 직감한 췐좡페이는 친전 경고도 무시하고 전문내용을 모두 보았다. 순간 경악했다. 국민당 우한지역 정보책임자와 군사령관이 보낸 것으로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공산당 정치국위원겸 정보책임자인 구순장을 체포했는데 (중앙SUNDAY 6월8일자 26면 참조) 공산당을 파멸시킬 수 있는 극비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함. 사안이 매우 급하므로 구순장을 난징으로 즉시 이송하겠음. 구순장 체포 사실이 알려지면 공산당 지도부 일망타진 기회가 사라지니 극비 보안을 유지할 것’

이를 본 췐좡페이는 공산혁명의 꿈을 펼쳐 보기도 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를 직감하고 상하이의 저우에게 급보했다. 급보를 접한 저우 등 지도부는 신속히 피신해 가까스로 체포를 면했다. 급박하게 돌아간 이 짧은 순간은 공산당 지도부가 와해 될 수 있는 위기를 막은 결정적 순간이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국민당 정보기관에 침투한 췐좡페이 덕분이었다. 이후에도 전삼걸은 국민당 내부정보를 빼내 초기 공산당의 위기를 수차례 막았다. 그래서 훗날 저우는 “만약 전삼걸이 없었다면 공산당 지도자들이 벌써 다 죽어 중국 역사는 달리 쓰였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전삼걸을 이끈 첸좡페이. 전삼걸은 국민당 정보기관에 침투한 3인을 말한다. [사진 위키피디아]
전삼걸을 이끈 정보리더십도 눈길을 끈다. 외세의 침탈이 한창이던 1919년 베이징대 의대를 졸업한 췐좡페이는 소련 공산주의에 매료돼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당시 소련은 다른 열강과 달리 카라한선언을 통해 중국에 대한 일체의 불법 침탈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공산당에 입당한 후 췐좡페이는 우연히 상하이 무선전신훈련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훈련반에 들어가 보니 국민당이 설립한 위장 정보기관임을 알았다. 이를 보고하자 저우는 췐좡페이뿐만 아니라 후디 그리고 훗날 중국의 초대 정보수장을 맡은 리커눙까지 훈련반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무선전신반은 향후 국민당에 대한 정보수집의 보고가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전삼걸 3명은 적의 정보기관에 함께 위장 침투했다.

그런데 쉬언쩡은 저장성 후저우중학교 동문이자 베이징대 수재인 췐좡페이를 매우 아껴 비서로 임명했다. 그러자 전삼걸의 정보활동은 적진 내부에서 업무회의까지 할 정도로 날개를 달게 되었다. 이에 저우는 전삼걸에게 당에 보고하지 않고 3명이 의논해 모든 일을 결정하도록 전권을 주었다. 이처럼 저우는 신뢰의 리더십을 통해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해 주었다.

용담호혈 후삼걸의 활동도 평가할만하다. 후삼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슝샹후이는 1936년 칭화대 입학과 동시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입당 후 슝샹후이는 당의 지시에 따라 후베이성 우한의 친(親)국민당 단체인 후난청년전쟁지역근무단에 가입했다. 그런데 이 단체가 젊은 엘리트들로 구성돼 있어 사회적 관심을 받자, 국민당 군의 후쭝난(胡宗南) 장군은 인재발굴을 위해 이 단체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후쭝난은 슝샹후이를 스카우트했다. 애국애민 정신과 혈기왕성한 모습이 인상적인데다 아버지가 후베이법원 형사법원장을 역임한 명문가였기 때문이었다.

절대 열세 였던 공산당이 승리한 비결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슝샹후이가 이 사실을 당에 보고하자 저우는 하늘이 준 기회라며 반드시 후쭝난 장군의 참모로 침투하라고 지시했다. 장제스의 심복인 후쭝난 곁에 스파이를 붙여 국민당 내부 돌아가는 것을 상세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저우는 슝샹후이에게 ‘불입호혈 언득호자’(不入虎穴 焉得虎子) 즉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를 잡겠는가’라는 글을 직접 써 줄 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였다. 금상첨화로 후쭝난 장군은 슝샹후이를 국민당의 인재로 키우기 위해 1938년 육군 군관학교에 입학시키고 졸업 후에는 자신의 비서로 발탁했다. 국민당 사람으로 완벽하게 위장한 슝샹후이는 정보활동에 날개를 달았다.

이후 후쭝난의 비서로 일하면서 슝샹후이는 국민당 군의 기밀정보를 수시로 빼내 공산당에 보고했고, 이 정보 덕분에 공산당은 혁명의 성지인 산시성 옌안을 수차례 방어할 수 있었다. 가령 중일전쟁 중이던 1943년 장제스가 후쭝난에게 옌안지역 공산당을 모두 섬멸하도록 지시하자, 슝샹후이가 이 정보를 입수해 공산당 지휘부에 알렸다. 마오쩌뚱은 이 정보를 이용해 반(反) 국민당 민심을 불러일으켜 상황을 반전시켰다. 마오는 “중일전쟁이 한창인 이 시점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에 공동 대항해도 모자랄 판인데도 국민당이 총구를 공산당으로 돌리는 것은 중국에 대한 배반”이라고 강력한 여론전을 펼쳤다. 그러자 마오의 생각대로 민심이 싸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결국 후쭝난은 공격 하루전인 7월 8일 공산당 섬멸 계획을 전격 취소했다. 슝샹후이의 정보 덕택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옌안을 수호했다.

1947년 3월에도 장제스가 후쭝난에게 공산당 근거지인 옌안 공격을 지시하자, 슝샹후이가 작전내용을 미리 빼내 모두 공산당에 알려 주었다. 이에 공산당은 질서있게 신속히 옌안을 빠져나왔고 전력 손실없이 빠져나왔다. 그 덕분에 공산당은 1년 뒤인 1948년 옌안을 다시 수복할 수 있었다. 마오는 “슝샹후이 혼자서 수십개 사단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용담호혈 영웅들은 시대 상황과 모험 정신, 정보 리더십이 어울어져 만들어진 것으로 이들의 활약상을 따라가다 보면 중국의 역사가 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중국은 청나라 붕괴이후 30년간 숱한 혼란을 겪으며 난세가 이어졌다. 난세를 헤치고 신중국을 세운 지도자들의 리더십 뒤에는 소리없이 싸운 스파이 전사들이 있었다. 전삼걸은 공산당 지도부가 국민당에 의해 일망타진될 위기를 수차례 구했고, 후삼걸은 국민당 군의 극비 군사정보를 빼내 공산당의 최후 승리를 뒷받침했다. 중국공산당 당사(黨史) 연구실은 건국과정에서 정보가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절대 열세의 공산당이 국민당을 이길 수 있었던 비책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제1세대 공산당 정보요원들이 2017년 북경에 모여 ‘스파이전선 9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영웅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물론 자신이 스파이인지도 모른 채 스파이 활동을 한 이름없는 용담호혈 전사들도 기억해주기 위해서였다.

이념을 떠나 정보의 관점에서 볼 때 용담호혈 정보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글로 쓰면 한두줄에 불과한 짧은 정보가 국가의 운명과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비책임을 보여준 사례란 점에서 그렇다. 또한 이런 정보는 적의 심장부에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결단과 절실함의 댓가로 얻어진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나아가 정보요원들의 용기와 헌신은 정보 이용자, 즉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뒷받침될 때 빛이 나고 완성된다는 것도 보았다. 또 한가지 반드시 새겨야 할 점이 있다. 세력 경쟁이 치열할수록 그에 비례해 정보 침투도 격화된다는 점이다. 북한과 대치한 우리가 더욱 주목할 부분이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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